'stars'에 나타나는 고대 희랍 형이상학의 극복
나는 이전에 로시의 bee에 대한 이전의 분석글에서 별의 관념과 이데아를 동일시한 이력이 있다. 아마도 다들 그럴듯한 개소리 정도로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별과 이데아의 동일시는 로시의 작품들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은유이며 그 시발점은 데뷔곡인 star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왜 이 곡의 제목은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일까?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극복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세계관의 근간으로 삼기 때문이다. 많음을 긍정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에 대해 이미 암묵적 결별을 선언하고 플라톤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겠다는 선언이 이 제목에는 함축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배경을 무시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 제목이 복수인 것은 가사 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별 하나가 아니라 여러 별의 집합인 별자리이기 때문이리라. 별자리는 별들 사이의 관계, 곧 이데아들의 관계맺음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입장에서 볼 때 대상의 정의와 같다. 왜냐하면 여러 본질들이 한 데 섞여서 나타나는 실체, 그것이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자리는 정의와 같다. 화자는 자신의 정의를 상처투성이로 내리고 있다. 무엇이 화자를 이토록 상처받게 했을까. 이후의 가사에서 유추해보면 목적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제는 무엇이었는지조차 망각한 '되고 싶었던 사람' 때문에 화자는 상처를 받고 행복을 회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 목적이라는 것은 자연스레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을 상기시킨다. 질료부터 형상까지를 일렬로 나열하고 형상을 목적으로 치환하는 그의 철학은 당연하게도 목적을 따르는 삶, 목적이 이끄는 삶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규정했다. 화자는 이 부분에서부터 데카르트적 회의를 시작한다. 과연 그 목적을 이룬 후에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하지 않은 삶을 탁월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화자는 형상에 대한 지향성을 돌이켜 질료로의 회귀를 말하지는 않는다. 화자가 그림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음에서 그런 내용이 나타난다. 그림자는 미메시스, 모방의 상징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데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으로, 미메시스는 질료로 환원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림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질료로의 회귀를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진퇴양난의 상황, 형상을 향해 나아다가 상처투성이가 될 수도 없고 질료를 향해 뒷걸음질 칠 수도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할 것인가. 그것은 목적론의 틀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화자는 이 틀을 부수고 새로운 틀, 곧 자율성의 형이상학을 전개한다. 밤하늘에다 이제껏 규정되지 않았던, 새로운 자신의 별자리를 그려낸다. 스스로 자신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함으로써 화자는 목적론을 극복하고 삶의 매 순간 자신을 기투하는 실존적 주체로 거듭난다. 이 주체는 이제 더 이상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명확성을 보장받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명확함이라 함은 다른 것들과 쉽게 구분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형상의 특징인데 형상과의 단절을 선언했으므로 남은 것은 잘 모르겠고 뭔지 모르겠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저것 섞여서 명확하게 규정되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있는 것, 이것을 화자는 마음이라 말하며 새로운 인식주체로 등극시킨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나중에 파스칼의 심장과 로시의 세계관, 사랑이론을 비교해 볼 때 진행해 보겠다.
로시의 데뷔곡은 인간주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림으로써 마무리된다. 인간은 반은 거짓말, 절반은 진짜 말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존재다. 플라톤에게 물질세계는 허상이며 이데아, 곧 정신세계가 진짜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존재로 귀결되며 이 모순되는 두 성질의 결합에서 인간은 에리히 프롬이 분석한 바와 같이 무한한 자율성과 함께 공포를 얻는다. 이 심신이원론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로시는 또 한 번 방황을 시작할 것이고 화자는 그런 자신을 안아주고는 싶지만 쉽게 그럴 수 없다. 이 문제는 그대로 베르크손의 형이상학으로 연결될 것이며 화자는 베르크손 철학의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릴 것이다.
이상의 분석에서 로시는 그 시작부터 소크라테스의 현현이자 플라톤의 뮤즈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노래하는 고통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닌 존재론적 차원의 고통이다. 그녀의 풍성한 철학적 함의가 선사할 즐거움을 기대해보자. 그녀가 노래할 또 하나의 대화편을 기대해보자.
절대로, 절대로 로시가 예뻐서 기대하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