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밀이 철학
이 일을 위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때를 밀어본 적이 있는가? 몸을 지나는 수건은 연두색, 분홍색, 노란색의 ‘삼색 떡’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표면은 자비 없이 거칠다. 거칠수록 새 것이다. 아디다스마냥 검정 줄이 네 개 있는 게 핵심이다. 나의 경우 유년 시절 주 1회 때밀이가, 주일날 교회 가는 것만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둘 다 하지 않는다는 것도 둘의 공통점이다.
[ 부산의 목욕탕에는 □가 있다 ]
지금은 종영한 KBS <스펀지>에서 이런 문제를 냈다. 나와 동생은 외쳤다. “이게 없단 말이야?” 네모 칸에 들어갈 답은 ‘때밀이 기계’. 혼자 목욕탕을 찾은 사람들은 등을 밀 수 없으니 이 기계가 도와준다. 볼록한 원판에 때수건이 끼워져 있고 ‘작동’ 버튼을 누르면 뱅글뱅글 원판이 돌아간다. 돌아가는 기계에 등을 들이밀면 된다. 아, 기계를 사용하기 전과 후 청결을 위해 원판을 닦는 건 필수다. 때수건은 내가 교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사람들은 때밀이에 진심이다.
등산하다 송진을 흠뻑 맞고 온몸을 흙에 비비다 문득 목욕탕을 찾았다. 목욕탕도 10년만인데, 혼자 목욕탕을 찾는 건 또 처음이다! 늘 엄마가 바구니를 챙겨들고, 바나나우유를 마시는 조건으로 목욕탕을 찾았다. 이제 이 냉장고에 있는 모든 음료를 ‘내돈내산’ 할 수 있는 어른이 됐다. 하지만 목욕탕에 대해서 너무 잊어버렸다. 폼클렌저만 달랑 챙겨간 나는 몸을 씻을 수가 없었다. 비누라도 빌리려는데 벌거벗은 몸으로 다가가 말 걸 용기도 안 났다. 유독 부끄러웠다.
등 10,000
전신 25,000
발 마사지 36,000
안내판 뒤로 장미 속옷을 입은 선생님과 살구색 속옷을 입은 선생님이 있었다. 능숙하다는 말로는 모자란 손길이 보인다. 두 선생님은 엎드린 두 사람의 때를 밀면서, 서로 눈을 맞추며 대화도 했다. 어릴 땐 돈도 없거니와 내가 밀면 되는데 왜 돈을 쓰나 싶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찌든 내 몸을 편히 뉘이고 묵은 때를 벗겨 내보련다!
다짐과 다르게 쭈뼛거리며 나가서 직원에게 물었다. “전신… 밀려면 돈을 여기다 내는 건가요?” 생각보다 바로 ‘yes’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니야들 일정이 될랑가. 기다려 보소.”
직원 / 언니야, 다음 타임에 손님 있나?
장미 / 없다. 내도 이제 드갈라고.
직원 / 아이, 아가씨 하나가 아무것도 안 가와가 목욕을 몬하고 있다. 씻기 돌라는데?
장미 / 알따. 온탕에 몸 불리고 있으라 캐라.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 서비스로 빌린 샴푸로 머리를 감고 몸을 대강 씻은 뒤 온탕에서 30분 정도 기다렸다. 오이 알러지가 있냐고 묻기에 없다고 했더니 바구니에 오이와 강판을 들고 나가 오이팩을 만들어 왔다. ‘때밀이 공간’으로 들어오란다. 누우란다. 누웠는데 침대(?)가 너무 뜨거웠다. 뜨겁다고 하니 “따끈하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참고 조신하게 누웠다. ‘따끈한’ 수건을 몸 위에 덮어주고, 머리에 샤워캡을 씌우더니 냅다 오이를 얼굴에 올렸다. 입과 코로 오이가 줄줄 흘러 맛이 느껴졌다. 숨을 참고 막아냈다.
장미 / 아가씨, 아파요, 어때요?
나 / 조금… 아파요.
첨벙첨벙 물소리가 나더니 이내 수건을 조금 부드러운 표면으로 교체했다. 눈덩이 위에 오이가 올라가 있어 때수건에 뭘 묻히고, 얼마나 깨끗이 닦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벅벅, 강도가 세졌다 약해졌다를 느끼며 몸을 맡겼다. “어어, 내 한 타임 비었다” 전화를 받더니 살구색 속옷의 선생님도 추가 손님을 받았다. 넷은 그렇게 ‘때밀이 존’에서 함께였다.
손님 / 언니는 워낙 힘들게 살았다이가. 그래도 지금 좀 낫지요?
장미 / 힘들게 살았제. 지금도 또옥같다. 한 치도 다른 게 없다.
손님 / 그라나? 그래도 시윤이 보니께 아가 멀끔하고 하드만.
장미 / 시유이한테는 내 다 해주니까 카지.
손님 / 언니야도 요새는 좋아비드만!
살구 / 저 언니는 원체 힘든 티도 안 냄서도…. 돈 그거 몇 백 사기당한 것도 있다이가.
장미 / 그래. 누가 떼묵었다. 내가 지금 십 몇 년을 이래 일을 하고 있는데도 돈이 안 모인다, 돈이.
손님 / 언니 한 타임도 안 빼고 일 한다이가.
살구 / 그니께, 내가 아깝다니까. 우짠단 말이고. 그 죽일노무 새끼 함 걸리기만 해라, 마.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장미 / 아이다. 근데 갸 탓은 안 한다.
살구 / 와? 갸만 아니었어도 언니 지금 일 고마 쉬었다.
손님 / 그란다고? 하이고. 속상타, 하이고.
장미 / 아이라니께. 그 돈은 없어질 돈이었던기다. 아마 갸가 사기 안 쳤어도 다른 방식으로 없어졌을기다. 이번에도 봐봐리. 내가 겨우 다시 메꿔놨는데 금세 또 시유이가 가지갔다. 돈 모을 팔자가 아닝기라.
살구 / 그기 뭔 소리고? 억울하지도 않나.
장미 / 만다꼬. 돈, 돈 캐싸도, 뼈 빠지라 일햐도 이라고 살고 있는 거 보면 이기 내 길이다.
한 타임에 2만5천 원. 1시간을 오롯이 고객의 몸만 바라보며 전신에 힘을 쏟는다. 때밀이를 업으로 삼은 그는 한숨 섞인 말을 하면서 동시에 두툼한 엄지로 내 두피를 눌렀다. 목으로 꾹꾹 내려가더니 어깨까지 마사지한다. 분명 마사지는 서비스라고 했는데, 이게 정녕 서비스가 맞는가. 돈을 따로 드려야 할 것 같은데. 구석구석 안 시원한 데가 없고, 때밀이가 아니라 어떤 ‘의식’을 하는 느낌이었다. 묵은 때를 벗겨야 한다는 게 바로 이거였다. 그때 장미 선생님이 허벅지를 탁탁 두 번 쳤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뒤집으소’ 사인이구나. 바로 떠올리지 못한 나는 한 소리 들어야 했다. “아가씨, 내가 두 번 칬다이가. 옆으로. 돌아.”
장미 / 아따, 니는 뼈가 튀어 나오겠다.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다.
손님 / 원체 살이 안 찐다. 체질이 그릏다 카이까.
살구 / 내 지금 밀면서도 안씨러버 죽겄다. 이거 밀다가 아 살도 다 밀릴까봐.
장미 / 이거를 십 몇 년을 할라 해봐라. 내는 녹용, 홍삼, 이런 거 챙겨먹은지 좀 됐다. 운동도 날마다 하고. 그거 안 하면 이 일 못한디.
장미 선생님이 몸관리한 덕에 나를 호사를 누리고 있다. 정확하고 개운한 터치, 속까지 긁어주는 강약조절 능력, 1시간을 지치지 않는 힘. 장미 선생님은 어깨도 딱 벌어졌다. 탄탄한 몸에서 다부진 힘이 느껴진다. 수건을 적셔 내 얼굴에 있는 오이를 닦았다. 거침없지만 전혀 자극적이지 않는 움직임은 어떻게 만들어내는 걸까.
장미 / 일만 해도 힘들어 뒤진다. 집에 가면 녹초라니께. 근디 그때 그냥 쉬기만 해버리믄 체력 관리가 안 돼. 산도 타고 요리조리 무거운 것도 들고. 수시로 몸 관리를 한다이가.
살구 / 저 언니가 프로다, 프로. 내는 저리 몬한다.
손님 / 내도 프로한테 받아야겠는디? 자리 좀 바꾸이소, 아가씨.
장미, 살구 / (깔깔)
발과 종아리를 만져주던 장미 선생님은 내 발가락을 보고 놀렸다. 아가씨 발이 왜 이러냐고. 딱 맞는 신발을 신어야 발가락이 안 눌린단다. 선생님 발을 슬쩍 내려다봤다. 장미 선생님의 발은 발톱 빼고 모두 하얗게 불어터져 있었다. 잠깐 불에 불린 모양새가 아니다. 온탕에 잠깐 몸을 담근 내 손발과는 다르다. 발톱 주변이 성하질 않고 발목까지 퉁퉁 부었다. 뜨거운 물만 수시로 퍼붓고 손님이 있으면 내내 서있어야 하는 일.
“아이고, 1시간 고생했네, 아가씨. 바디로션은 있나? 고 나이때부터 피부 관리 잘해야 쓴대이."
‘시윤이 엄마’라 적힌 바디로션을 내어주셨다.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본인 손에 꾹 짜 내 등부터 펴 발라준다.
“에고, 내 오늘 처음 앉는다. 에고고, 다리야.”
부드러워진 내 팔을 만지다, 때수건보다 거칠고 두꺼운 장미 선생님 팔을 보았다.
“아가씨, 여기 방에 묵지? 내일 아침에도 와. 제대로 푸욱 씻어야 그날 하루가 가뿐하게 흘러가.”
호기심에 낸 2만5천 원에 장미 선생님의 철학을 배웠다.
사기꾼을 원망해봐야 나만 힘들다.
없어진 돈은 없어질 팔자다.
일을 위해서 몸 관리는 1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