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으로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같은 옷을 입어도 눈치는커녕, “목까지 올라오는 새빨간 니트 있잖아” 해도 끝내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날 그가 어떤 차림이었는지는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기억난다. 무늬 없는 하얀 티셔츠와 베이지색 통 큰 바지, 그 위에 연하늘색 가디건을 걸쳤다. 신발은 클래식한 뉴발란스 러닝화였다.
키가 유달리 컸다. 그거 말곤 스무 명의 사람들과 섞였을 때 그를 기억할 만한 특징이 없다. 별 말 없이 구석에 앉아 끄덕이고 웃기만 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춤을 췄고, 머리 위로 수건을 흔들었고 건배사를 외쳤지만 그는 장단만 맞췄다. 자정이 넘어서야 테이블에서 잔들이 사라졌고 모임 주최자 중 한 사람과 그와 나, 이렇게 세 명만 남았다.
그는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좀 전까지는 칵테일 머금은 보조개만 보여주더니, 남은 사람들에게는 꽤나 진지하게 다가왔다. 가치관에 안 맞는 일을 해야 한 순간은 없었는지, 원래 사람을 좋아하는지, 아끼는 영화는 무엇인지… 특히 나에 대해 궁금해 했다. 평소 질문을 하기만 하다 받아보니 신이 나서 나머지 한 사람의 존재에 대해 잊고 그와 둘만 있는 듯 대화가 오갔다.
그의 안광이 반짝였던 순간이 있다. 뜬금없이 애니메이션 하나를 ‘강력’ 추천했는데, 평소에 만화를 보지 않는다 하니 바로 반쯤 감은 눈이 됐다. 입까지 톡 내밀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눈빛을 보내더라. <바이올렛 에버가든> 꼭 볼게요, 했다. 아, 다른 한 사람은 이때쯤 자리를 비웠다. 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새벽 4시까지 떠들었다.
사랑을 나눴다.
#1
사랑은 운명이다. 그를 만나기 전 알던 남자들은 사랑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러지 못할 거란 걸 알았다. 그는 달랐는데,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순간부터 직감적으로 곧 그를 사랑하리라는 걸 느꼈다. 어떻게 그 장소에 우리가 함께였을까, 어쩜 우리가 끝까지 남았을까, 우린 운명인가보다!
#2
사랑은 우연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 옆의 또 다른 이를 사랑했을 거다. 마침 축구 경기를 볼 데가 따로 없어 모임에 나갔다는 우연, 술을 좋아해 오랜 시간 남아있었다는 철저한 우연. 그가 아니라 다른 이였어도 그리 됐을 것이다. 사랑하게 되는 건 몇 겹이 우연히 쌓인, 우연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1
처음이었다. 미슐랭 식당 앞에서 네 시간을 기다려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재미있겠구나 싶었다. 그게 사랑이지. 난 이야기‘꽃’이 뭔지 그 덕분에 알게 됐다. 소울메이트라고 하면 과하려나. 그가 아니면 안 된다. 눈만 마주쳐도 그가 사랑스러웠고, 그가 하는 이야기가 내게 전부 의미 있었고, 그는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2
사람은 사랑을 할 때마다 그 사랑이 특별한 이유를 부여한다. 이번에는 ‘대화가 잘 통한다’라는 그닥 특별하지 않은 의미다. 그 이전에도 다른 이를 각각의 이유로 사랑했다. 첫만남 이후에도 그와 나는 눈물 흘리며 읽은 책이, 싫어하는 운동이 같다는 우연이 맞닿았고 사랑은 지속될 수 있었다. 꼭 그여야만 하는 건 아니다.
#1
나는 그의 옷차림도 기억했다고! 그와 겪는 것이라면 역경도 두렵지 않다. 사랑은 쟁취고 전투이고 불안이기도 하다.
#2
한 걸음만 빠져나와 볼래? 험난한 길이라면 이미 그건 사랑이 아니라 오기다.
하나는 운명, 하나는 우연이라 생각했던 그 사랑은 결국 우이의 불연속을 맞닥뜨리며 끝이 났다.
“어쩔 수 없잖아.”
내게 날개를 달아줬던 그가 나를 부쉈다. 나는 그가 되길 원했으나 그는 자신이 타인임을 내가 인지하길 바랐다. 그가 떠난 직후 그와 나눈 대화, 옆자리의 온기와 수줍었던 손길을 갉아먹으며 지냈다. 유일한 사랑이니까 아무도 그를 대체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 우연이 겹친다면 그는 나를 사랑할 거고, 나 또한 틀림없이 그를 사랑하겠지. 하지만 그에게는 그 사이에도 또다른 무수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 내가 곱씹은 건 유일무이가 아니라 다채로운 우연 중 하나겠구나. 이제 나는 만화를 혐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