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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y 14. 2022

포스터가 떨어진 자리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아무도 모르는 계절이 있다사람은 떠나도 어떤 마음은  계절에 남아 흔적이 되고 자국이 되는 것이다." 




그해 나는 같은 도시로 돌아간 걸까, 아니면 같은 계절로 돌아간 걸까. 마지막 너의 말은 벽과 벽 사이에 있을까, 계절과 계절 틈에 있을까.

구름이 해를 가리다 말다 하는 날이었다. 마레로 접어들 무렵, 나는 오랫동안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단어 하나를 빗물 웅덩이에 떨어뜨렸다. 풍덩! 퍼져나가는 동심원이 차례대로 가장자리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았다. 얼마 후 수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멍하니 서있는 내 모습만 떠있었다. 난 잃어버린 단어가 아쉬워 허공에 중얼거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말줄임표처럼 날아온 까마귀 세 마리가 그마저 날개 짓으로 지우고 갔다.


마레를 향해 걸어갈 때면 어떤 순서로 좋아하는 장소에 들릴지 생각을 한다. 그날도 나는 머릿속에 그린 동선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분명 해가 떠있는데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것이다. 비가 와도 뛰거나 우산을 꺼내 쓰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이곳이 나는 좋다. 문 닫힌 가게 앞에서 잠시 굵어진 빗방울을 피하는데 길 잃은 이름들이 비를 피해 모여들었다. 우린 처마 밑에서 젖은 담배를 나눠 피웠다. 내 옆의 남자는 바람 같은 목소리로 내게 무언가 말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 그의 어깨너머로 오렌지색 종이가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성당에서 피아노 독주회로 쇼팽 곡들을 연주한다는 포스터였다. 그 벽에는 다른 연주회 포스터들도 여러 장 붙어 있었다. 빗물에 젖어 곧 떨어질 것 같은 얇은 종이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저 포스터를 보고 몇 명이나 저 성당으로 가게 될까. 날씨는 금방 맑아졌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조금 싸늘한 느낌이었다. 나는 철학자들 카페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서 찻주전자 속 들쥐 카페로 향했다. 언제나 찻주전자 속 들쥐에는 손님들이 많다. 그날은 다행히 빈 테이블이 있었지만 손님이 많아서 종업원들이 꽤 바빠 보였다. 난 시간도 많고 오랫동안 앉아 있고 싶었기 때문에 종업원과 눈을 마주치려 애쓰지 않았다.

사람들의 체온과 노란 불빛과 웅성웅성 거리는 대화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난 카페의 벽에 붙어있는 많은 포스터들을 보았다. 찻주전자 속의 들쥐는 음식 맛으로도 인기가 좋지만 연극 포스터, 출간 포스터 등 다양한 포스터들이 카페 가득 붙어있는 분위기야말로 이 카페의 가장 큰 매력 아닐까. 포스터들은 찢어지기도 했고, 겹겹이 붙어 있기도 했다. 액자를 하지 않고 툭툭 붙여놓은 포스터들이 시간이 지나면 찢어지는 건 당연할 것이고, 누군가 새로운 포스터를 가져오면 주인은 오래된 포스터 위에 겹쳐서 붙여야만 했을 것이다.  

저 포스터 밑의 포스터 밑의 포스터 밑에는 무엇이 붙어있을까. 보이지 않는 포스터 중에 가장 오래된 건 어떤 걸까. 어떤 시인의 낭독회일까, 아니면 어떤 소설책의 출간 포스터일까.


주문한 차가 나왔고 포스터들을 보다가 벽에 있는 빈자리를 발견했다. 보통 크기의 포스터 하나는 붙일만한 크기였다. 저 빈자리가 원래부터 빈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동안 많은 포스터들이 붙어있던 자리였을 텐데 지금은 왜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저 최근 붙여놓았던 포스터가 어쩌다 떨어져 버렸고, 그 이후 붙일만한 다른 포스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자리에 남은 풀 자국과 테이프 자국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무언가 간신히 붙들고 제발 좀 봐달라고 외치다가 결국 놓아버린 흔적. 왜 무언가 있다가 사라진 자리들은 이토록 슬픈 걸까. 가끔 난 무엇이든 빈자리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문득 수십 년 전 어떤 예술가가 이 카페에 와서 자신의 전시회 포스터를 붙여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무거운 포스터 뭉치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붙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고, 사정이 괜찮으면 신문에 광고를 내는 정도 외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던 그 시절의 예술가들은 수많은 홍보 채널이 있는 지금의 예술가들에 비해 불행했을까. 정말 불행했을까.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아무도 모르는 계절이 있다. 사람은 떠나도 어떤 마음은  계절에 남아 흔적이 되고 자국이 되는 것이다. 나는 유적을 발굴하듯 벽과 벽 사이에, 계절과 계절 틈에 숨어있는 흔적들을 찾는다.

식어버린 차를 마시는데 다시 웅성웅성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손에 쥔 폰을 보고 있었다. 저 손 안에서는 이곳을 가득 채운 포스터보다 훨씬 많은 포스터들이 찢어지지도 겹쳐지지도 않은 채 휙휙 넘어가고 있을 것이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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