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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y 19. 2022

우주적인 키스

여행 산문. 여행 에세이

"나는 그것이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에 들어가는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세계 깊숙이 들어가는 외로운 우주선 하나에 탑승한 것이다."




그 시절, 신은 내게 사랑만을 툭 던져놓은 채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손에 쥔 게 구슬 세 개뿐인데 그걸 하나 둘 빼앗기다가 결국 하나만 남았을 때 기분이 어떨 것 같아?” 난 나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그래서 사랑을 갈구했던 걸까. 끝없는 상실을 사랑으로 채우려 했던 걸까. 그럴 수 있다고 믿은 걸까,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붙잡은 걸까.


바람이 불었다. 자전거를 탄 여인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나를 둘러싼 세상이 진공 상태가 된 것 같았다. 자전거 바퀴 소리도, 길을 걷는 사람들의 대화도, 글라스가 부딪치는 소리도 한순간 사라졌다. 분명히 모두가 움직이고 있는데 누군가 세상의 볼륨을 0으로 내려버린 것 같은 저녁이었다. 느낌이었을 뿐일 텐데 그게 왜 슬펐을까. 와인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내 목소리도 웨이터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볼로냐에서의 첫날, 나는 숙소 근처에 있는 카페 외부 자리에 앉아서 파스타와 함께 와인을 마셨다. 이곳에 온 이유는 오직 그림책 페어를 보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나는 도시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동안 머물다 떠날 곳이라고 생각해서 특별히 유명한 식당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냥 발걸음 멈추는 카페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왜 차가운 와인잔에서 그녀의 입술을 느꼈을까. 1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와인을 마시지 못하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사방의 소리가 모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인생이란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그런 사람인 척 사는 일인지, 행복하지 않으면서 행복한 척하고, 내 생각과 다른 일에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하며 살아온 시간들이 높은 요새가 되었다가 한 순간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다.


사랑을 잡을 수도 현실을 잡을 수도 없던 시절, 당신과 나의 거리는 우주의 넓이만큼이나 광대했다. 하지만 공중에서 부유하던 먼지가 충돌하듯 우린 만났고, 어느  당신은  곁에 누워 나를 바라보았다.  ,   ,  번째 당신의 입술이 내게 닿을  나는 눈을 떴고 당신의 눈과 눈썹과 볼과 흘러내린 머리칼을 보았다. 그건 단순한 얼굴이 아니었다. 내게는 은하계보다  우주처럼 보였다. 눈앞에서   개의 별이 반짝거렸다. 그건 너무나 가깝지만 아득히   하나의 차원이었고, 허튼 미련 하나 남기지 못하도록 모든  빼앗아 가버린 신이 놓친 우주 같았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잔을 다 비우자 다시 세상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손등에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포기해야 했던 일들과 놓쳐버린 많은 시간들이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이젠 정말 늦어버린 걸까. 어떤 기억은 그때의 감촉과 온도와 빛과 같은 어떤 것과 마주치면 초신성처럼 폭발하고 만다. 어느새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다고 허공에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력하게 지나온 세월이 서글퍼서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나는 왜 더 냉정하게 나를 위해 살지 못했을까.


숙소로 돌아와서 그림책 페어에서 받아 온 여러 가지 종이들을 보았다. 그림책 페어에는 아름다운 책들이 너무나 많아서 가다 멈추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림책 원화들은 미술관에 걸린 대형 그림보다는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아무래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감상하게 된다. 그중에 어떤 일러스트들은 아주 작아서 안경을 쥐고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문득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생각났다. 사진으로만 보던 그의 그림을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 정말 숨 막힐 것 같은 무게감을 느꼈었다. "나는 예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왔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작가가 권했던 것처럼 그림에서 45센티미터 떨어져 서보았다.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와 같은 거리에서 감상자가 그림을 보기를 바랐던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면 그 그림에 대한 느낌도 당연히 달라지겠지만 주위에 다른 것이 잘 보이지 않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에 들어가는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세계 깊숙이 들어가는 외로운 우주선 하나에 탑승한 것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시야를 넓혀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실은 시야를 좁히는 게 그보다 훨씬 어렵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원치 않아도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들이 날마다 솟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방향만 바라보려는 나의 바람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도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그런 세상에서 시야를 넓히라는 말은 그만큼 자신을 포기하고 남들처럼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다며,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도 그 일은 삶을 힘들게 만들 거라며 나를 둘러싼 세상이 계속 말하는 것이다.


그날 내 눈앞에 보이던 당신의 얼굴이 우주처럼 보였던 건 그만큼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눈, 코, 목, 어깨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거리가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당신이 키스하는 순간 나는 거대한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방을 둘러봐도 더 이상 나를 힘들게 만드는 건 보이지 않고 듣기 싫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당신이라는 우주.

숙소 밖에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것도 보기 싫어서 질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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