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서신 - 여행 산문. 여행 에세이
"인생에서 진심으로 원하는 무엇을 이루려는 순간에는 대체로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은데, 그렇다는 것을 알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차갑거나 뜨거워야 할 것이 미지근해졌을 때 그 느낌이 나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한여름 탁자 위의 물 잔이나 잠깐 사이 식어버린 한겨울의 커피잔도 그렇습니다. 그럴 땐 손가락이 느슨해지면서 삶이 별 거 아닌 거 같기도 합니다.
카페에 앉아 커피잔을 만지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카페 앞 거리에 아까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습니다. 잠시 후 음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 나누던 사람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춤추는 모임 같아 보였습니다. 춤을 추는 사람 중에는 남편과 아내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직장인이나 사업가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백발의 어르신도 몇 분 계셨는데 다 함께 어울려 춤을 추었습니다. 무대도 실내 공간도 아닌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거리낌 없이 춤을 추는 그들이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음악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디오 장비에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춤을 추던 사람들도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 상황에 대해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며 슬슬 몸을 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조금 수줍은 표정으로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서있는 중년 여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같이 어울리자고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는 웃기만 할 뿐 가만히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이 그친 후 한 남자가 그 여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손만 내밀었지만 함께 춤추지 않겠느냐고 묻는 표정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녀는 하필 음악이 끊긴 타이밍에 자신에게 춤을 추자는 남자가 재미있었는지, 활짝 웃으며 남자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왔습니다.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오디오를 고치지 못했는지 음악은 아직도 흐르지 않았지만 춤을 추는 커플은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습니다. 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등을 바라보는 오케스트라 단원처럼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중년의 여인의 팔 근육과 발목이 수선화처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원을 그리며 회전할 때마다 남자와 여자의 표정이 번갈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본 건 낭만이 가득한 파리지앵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직장 생활 때문에 피곤한 한 남자와 힘든 일상에 지친 한 여자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순간만큼은 숨을 쉬는, 이 순간만큼은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지금의 표정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음악 없이 춤을 추는 그들의 구두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햇살이 무대 위의 주인공에게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들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클라리넷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어떤 반주도 없이 이어지는 클라리넷 솔로가 다른 사람들도 나오라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사람들이 모두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그건 마치 삶이 아무리 피곤해도 그들이 있는 저 거리만큼만은 자유가 허락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난 그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 순간의 내 감정을 아득한 목록에 기록했습니다. 아득한 것들을 기록한 나의 아득한 목록은 그 목록 자체도 아득해서 무언가 쓰고 나면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글자들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뒷모습, 탁자 위에 내려놓는 힘없는 물 잔, 빈집 편지함에 꽂힌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편지, 점퍼 주머니에 불쑥 들어온 차가운 손, 운동화 발등에 떨어진 은행잎, 창틀에 잠시 앉았다가 사라지는 겨울 햇살, 칼바람에 날개 짓 하는 포장마차 천막, 박수소리 속에서 가만히 서있는 무표정한 얼굴, 건반 하나를 쳤을 때 텅 빈 강당 가득히 남는 잔향 같은 것이 나의 아득한 목록에 들어있습니다. 난 목록에 소리 없이 춤추는 남녀의 눈빛과 거리의 사람들을 춤추게 만든 클라리넷 소리를 추가했습니다.
나는 음악 없이 춤을 추면서 말없이 서로를 응시만 하던 커플의 눈빛에서 소설 한 권 보다 긴 삶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나는 때때로 그런 감정을 위해 무언가 주위의 것들을 지워버립니다. 글을 쓰고 나서 다시 읽으며 덧붙일 말을 찾기보다 지워야 할 단어를 찾아내듯, 곡을 쓰고 나서 더해야 할 악기를 찾기보다 필요 없는 소리를 하나 둘 제외시키듯, 그렇게 뭔가 지우고 나면 그 자리에 아득한 감정만 남는 겁니다. 삶이라는 것이 더하고 채워나가는 것보다 비우고 하나만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깨달은 이후로, 항상 무엇을 하든 줄이고 지우려는 노력을 합니다. 거리에서 춤추던 사람들에게는 단 하나의 악기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클라리넷 독주가 다른 어떤 음악보다 좋지 않았을까요.
노트북 안에 설치된 소프트웨어 하나만 가지고도 수천 가지 악기 소리를 동시에 낼 수 있는 지금, 어쩌면 작곡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필요한 소리만 남기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열명이 손짓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손이 그녀를 이끌어 춤을 추게 만들었듯이, 나는 글도 음악도 그림도 그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을 이루기 위해 단어를 채우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말을 채우고, 음악을 만들기 위해 음표를 채우는 일 보다, 문장을 이루기 위해 단어를 지우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말을 아끼고, 음악을 만들기 위해 쉼표를 채우는 일이 진정한 조화에 다가가는 길 아닐까요.
춤추던 그와 그녀는 클라리넷 연주가 끝날 때까지 춤을 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활짝 웃으면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당신을 존중한다는 것이며 당신을 배려한다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나는 장소를 옮겨 다른 카페에 앉아 나의 아득한 목록을 펼쳐보았습니다. 해가 지나고 해가 지나고 해가 지나서 어디 선가 마주친 얼굴과 해가 지나고 해가 지나고 해가 지나고 해가 지나서 먼 곳에서 발견한 이름, 이라고 쓰여있는 페이지에서 멈춰 먼 곳에 있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해가 지나고 해가 지나고 해가 지나 어디선가 당신을 만나면 우리도 그들처럼 아무 말 없이 춤을 출 수 있을까. 목록에 한 줄을 추가하는 동안 카페에서 들려오는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인생에서 진심으로 원하는 무엇을 이루려는 순간에는 대체로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은데, 그렇다는 것을 알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 글, 사진. 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