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산문, 여행 에세이
"나는 지구별 어딘가에 그런 곳이 한 군데라도 있다면 어느 날 다시 그곳을 찾을 날을 그리워하며 한 권의 술을 읽고 한 잔의 책을 마실 것이다."
파리에서의 일 년 중 어느 달을 가장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5월과 11월이라고 답하겠다. 5월은 가장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기 때문이고, 11월은 그와는 반대로 회색빛 캔버스에 누군가 단풍잎 몇 개를 그려 넣은 것 같은 분위기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짙은 가을의 파리는 으슬으슬 추워서 옷깃을 여미게 만들지만 차가운 의자에 앉더라도 더욱더 밖에 앉는 게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금방 식어버리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짙은 쓸쓸함을 끌어안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 곡을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인데 특히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 멜로디가 플루트에서 클라리넷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정말 아름답다. 플루트의 끝음과 클라리넷의 첫음 그리고 그 사이를 매우는 피아노 선율이 그토록 아련할 수가 없다. 그 곡은 너무나 파리의 11월과 어울려서 그날도 나는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리길 기대했다. 하지만 내겐 이어폰이 없었고 어느 골목에서도 그 곡은 흐르지 않았다. 나는 라흐마니노프만 들으면 완벽하겠다고 중얼거리며 마레를 걸었다.
오후가 저물어갈 즈음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여행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언제 어디서든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셔도 된다는 것이다. 내일 출근할 일도, 지금 당장 마감해야 할 일도 없고, 낮술을 마신다고 잔소리할 사람도 없으니 아침에 술잔을 기울여도 나만 좋으면 되지 않은가. 나는 주저 없이 좋아하는 술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을 술집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의 콘셉트를 한 단어로 말한다면 북 바(Book Bar)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세계 어디에서 들렸던 독특한 곳일지라도 한국에서 비슷한 콘셉트의 장소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책을 콘셉트로 하는 곳만 해도 북카페 같은 건 한국에도 많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어느 날 문득 가고 싶은 곳인데 한국에서는 비슷한 곳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곳. 그곳을 가려면 떠나야만 해서 막연히 그곳을 그리워만 하는 곳. 꼭 그곳을 가야만 허전함이 채워지는, 그런 곳도 있는 것이다.
그곳은 많은 책이 꽂힌 책장이 있는, 분명히 책을 파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쪽에는 바가 있고 바텐더가 술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곳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사람들이 서서 책을 펼쳐보면서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신기해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소설이나 시집 등의 순문학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바에는 각종 술병들이 오픈된 채로 있었다. 난 몇 권의 책을 펼쳐 보다가 조심스럽게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바텐더는 친절하게 내게 어떤 술을 원하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잠시 망설이니까 바텐더가 방금 오픈한 샴페인을 마시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좋다고 대답하고 바에 기대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한쪽 벽 위에 걸린 대형 거울 속에 보이는 사람들이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샴페인이나 와인 같은 건 한 번 따면 그날 다 팔아야만 할 텐데 그런 술들을 잔으로 파는 게 무척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샴페인을 한모금 마시자마자 내 옆에 앉아있던 프랑스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잔을 들어서 내게 건배를 권했다. 우린 눈웃음으로 인사를 했고 나는 시원한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다시 책들이 꽂혀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불어판 서적이 많아서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문판 책들도 조금 있어서 실비아 플라스의 책 한 권을 펼쳐보았다. 그때 내 옆에 있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자신은 영국에서 왔다면서 내가 들고 있는 책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샴페인 잔을 들고 서서 실비아 플라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를 포함한 그곳의 손님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어떤 세미나의 뒤풀이에서 토론을 하는 학자들처럼 보였다. 나는 간간이 거울에 비치는 우리 둘의 모습을 보았다. 정장을 입고 금발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은 그의 모습이 과거에서 온 영국 신사 같았다. 오랜만에 정서적으로 취해서 돌아오는 길이 즐거웠다. 그날 밤은 너무나 지적이고 아름다웠다.
윌리엄 포크너는 “위스키를 한 병도 끼고 있지 않은 작가는 빌어먹을 머리 없는 닭과 같다.”라고 했다고 한다. 오래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그런 것은 창작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술 한 방울 안 마셔도 훌륭한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있고 술을 마시면 더 멋진 시를 쓰는 시인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술을 마시는 작가라면 조금이라도 지적이고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곳에서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까. 나는 지구별 어딘가에 그런 곳이 한 군데라도 있다면 어느 날 다시 그곳을 찾을 날을 그리워하며 한 권의 술을 읽고 한 잔의 책을 마실 것이다.
/ 글, 사진 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