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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y 17. 2022

카메라 앤 시가렛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실패하면 안 된다는 마음보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것도 괜찮은 마음인 것이다."




오래전, 영화 '커피 앤 시가렛(Coffee and Cigarette)'이 처음 개봉했을 때 그 영화를 보고 무척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은 지금도 'Coffee and Cigarette'이라는 한 줄의 영어 문장만 보아도 설렌다. 좋아하는 짐 자무쉬의 작품이고, 너무나 멋진 흑백 영화인 데다가, 연기력 좋은 많은 배우들은 물론 내가 사랑하는 뮤지션 톰 웨이츠까지 출연을 하니, 마치 짐 자무쉬가 나의 취향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만들어 준 종합 선물세트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을 한글로 번역해서 적으면 왠지 맛이 안 난다. 영화 '커피와 담배'라. 당시 영화 수입사에서도 한글 제목을 어떻게 할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원제와 똑같이 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언어라는 게 그래서 재미있다. 발음이나 악센트 또는 알파벳이나 타이포그래피의 종류에 따라서 그때그때 다르게 뉘앙스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어 하나를 고르는 순간이 우주를 움직이는 순간일 수 있는 것이다.


작업실에 있는 커피 테이블에서 물을 끓이다가 전기포트 위에 붙여져 있는 사진을 보았다. 오래전에 파리에서 찍은 사진인데 마음에 들어서 프린트해두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로모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걸어가다가 팔을 내린 채 카메라를 뒤로 돌려 셔터를 눌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로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식의 소위 노룩(No Look) 촬영을 많이 즐길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빛의 잔상과 파인더를 사용하지 않은 우연한 앵글, 그리고 작은 톱니를 돌릴 때 느껴지는 아날로그 감성은 이 작은 카메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내가 처음 카메라를 들고 내 사진을 찍은 건 중학교 입학할 때 즈음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올림푸스 EE3가 있었다. 필름 한 컷이 반씩 찍히는 하프 필름 카메라. 필름 한 롤로 두 롤 분량의 이미지를 찍을 수 있는 카메라였다. 그렇게 카메라 한 대로 시작한 나의 사진 생활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나 또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사고팔며 살아왔다. 그중에는 비싼 카메라도 있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한 카메라는 펜탁스 MX와 로모였다. 그러나 내 로모는 언제부턴가 눈을 뜬 채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다. 디지털카메라가 쓸만해진 이후로는 고장난 로모를 고쳐서 쓸 생각을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모는 가볍다. 그렇기 때문에 들고 다니기 편하다. 그러므로 스마트폰 카메라가 강력해져도 같이 들고 다니는데 큰 부담이 없다. 로모는 작다. 그래서 길에서 촬영할 때 주목받을 일도 없다. 여러모로 여행자에게 좋은 카메라인 것이다. 단 하나, 지금 찍은 사진이 어떻게 찍혔는지 바로 볼 수 없고, 현상 후에 실패한 사진이 있을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셔터를 누를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보다 지금 내 눈앞의 풍경이 잘 담겼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매력적 아닐까. 실패하면 안 된다는 마음보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것도 괜찮은 마음인 것이다.


여행자의 가방에 넣어야 할 필수품은 뭐가 있을까. 여권, 돈, 수첩, 펜, 두 벌의 옷. 그리고 어쩌면 노트북도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빠질 수 없는 것이 카메라 아닐까. 위에 열거한 다른 것들에 비하면 카메라는 정말 여행자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손을 잡고 다니며, 같이 밥을 먹고, 곁에서 잔다. 설레는 여행자의 맥박을 느끼고, 심장 가까이서 심장 소리를 듣는다. 여행자의 떨리는 손끝과 쓸쓸한 마음을 함께 느낀다. 카메라는 그래서 여행자의 동반자인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들을 말없이 해주는 카메라. 아득히 먼 곳에 있어도 가방 속에 카메라가 있으면 나는 안도했다.


죽을 것 같은 회사를 그만두기 전, 나는 담배를 먼저 끊었다. 그리고 이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면 처음 보는 그곳의 담배를 사서 가방에 넣는다. 여행하는 동안에만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여행지의 어느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 연기만큼 푸르고 짙은 상념이 테이블에 담뱃재처럼 쌓인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라서 좋은 게 아니다. 안개처럼 흩어지는 담배 연기 속에 화석 같은 단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는 것 뿐이다. 빅 라이터의 부싯돌 소리나 가게에서 받은 성냥을 긋는 소리도 여행의 순간을 더 깊게 만들어 준다. 불 붙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비로소 내가 멀리 와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나는 숨 막히는 과거에서 탈출했다는 것에 안심한다. 그것이 잠시일지라도. 다시 돌아가야 할 걸 알더라도.


내게 카메라와 담배는 그렇게 여행의 동반자라고   있다. 요즘은 폰으로 사진 찍는 사람이 많고, 전자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 언젠가 연초 담배가 완전히 사라지고, 스마트폰이 어떤 카메라 보다 훌륭한 사진을 찍게  준다면, 그때 여행자의 가방 속엔 뭐가 남을까. 여행길의  동반자로 아이폰 하나면 충분할까. 영화 제목 '커피  시가렛'이라는 글만 읽어도 설레듯, 그때엔 '카메라  시가렛'이라는  마디 만으로  다시 날 것만 같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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