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산문. 여행에세이
"무엇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떠나는 나를 당신은 이해할까."
"내가 그를 동경하는 것이 그의 글 때문인지 아니면 비행기를 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그의 삶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붙이지 않은 편지가 보관함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든 문장을 잠시 보다가 다시 문을 닫았다.
여행을 떠날 때면 나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출발한 후 이메일로 잠시 떠나왔음을 알리는 경우가 많다. 어떤 편지는 행선지도 돌아가는 날짜도 밝히지 않지만, 어떤 편지는 떠나는 마음을 적어도 보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가 떠나려는 걸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은 언제나 내게 어디로 가냐고, 언제 올 거냐고, 거긴 왜 가냐고, 뭘 보러 가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알기에 부러 없는 계획을 만들어 말하거나 볼 생각도 없는 무언가를 볼 거라고 대답하곤 했다. 가끔, 아주 가끔 내 마음을 이해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라고,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 싶어."라고 고백한 사람은 당신뿐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떠나는 나를 당신은 이해할까.
난 아주 작은 공항에도 가봤지만 그렇게 텅 빈 공항에 도착한 건 처음이었다. 케플라비크 공항의 첫인상은 그렇게 텅 빈 것이었다. 깊은 공허가 끝없이 펼쳐진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파리에서 온 나는 어떠한 입국 조사도 가방 검사도 받지 않았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공항 직원 같은 사람을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리듯 밖으로 나온 내 앞에 처음 펼쳐진 건 눈 덮인 광활한 평야뿐이었다. 설원 위의 공항에 선 내 앞에는 희미한 지평선이 멀리 펼쳐져 있었다.
레이캬비크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났을 때 붉은 노을 위로 지나가는 경비행기를 보았다. 생떽쥐베리가 생각났다. 앙트완이라는 이름마저 아름답던 그는 왜 사라졌을까. 난 그의 책을 읽을 때보다 먼 하늘에 비행기 하나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볼 때 더 그를 떠올린다. 아마도 내가 그를 동경하는 이유가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니라 비행기를 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그의 삶 때문인 것 같았다. 붉은 하늘에 검은 동체 하나가 흘러가다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과 끝없이 공허한 땅을 보며, 이곳에는 바랬던 대로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때는 하루에 백 통 이상의 업무 이메일을 처리해야 했고, 아침 8시에 회사에 도착해서 밤 12시에야 집에 들어가는 일상을 반복하며 살았다. 그시절 나는 하루하루 늘어만 가는 일, 관계, 소음 등 모든 것에 지쳐있었다. 언제나 열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관리해야 했고, 쏟아지는 메일에 답신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지나서야 내 업무에 손을 댈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서랍 속에 명함이 늘어나 있었고 메일링 리스트도 그만큼 길어졌다. 일과 관계와 말과 거짓이 정지시킬 수 없는 기계가 생산하는 물건처럼 쌓여만 가는 나날이었다.
결국 난 그 모든 현실에서 도망치듯 떠났다. 이것 좀 봐봐, 이것 좀 들어봐, 이것 좀 먹어봐, 이 사람 좀 만나봐, 세상은 이미 꽉꽉 찼는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 더 채울 것이 없는지 끝없이 찾아 헤맨다. 난 그런 사람들 틈에서 더 이상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 여행은 언제나 다른 이의 눈에는 현실 도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내 여행 이야기를 좋아했다. 여름에 안 움직이고 가을에 떠나는 나를 이해했고, 무엇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떠나는 나를 당신은 이해하는 것 같았다. 당신은 아주 멀리 있어도 교신할 수 있는 우주선 같았다. 내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파리에서 레이캬비크로 가는 항공권을 사고 프랑스인 친구에게 설레는 마음을 알렸을 때, 친구가 말했다. "거긴 왜 가? 오로라 보러?"
"오로라를 보면 좋을 거야. 그렇지? 그런데 나는 실은 없는 걸 보러 가. 아무것도 채우지 않아도 되는 텅 빈 공허를."
아이슬란드 하늘 위를 지나는 한 대의 경비행기를 보고 그것에 당신이 타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행기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잠깐 흔들리더니 멀고 먼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 글, 사진. 희서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