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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Apr 25. 2022

없는 걸 보러 떠나요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무엇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떠나는 나를 당신은 이해할까."




"내가 그를 동경하는 것이 그의 글 때문인지 아니면 비행기를 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그의 삶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붙이지 않은 편지가 보관함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든 문장을 잠시 보다가 다시 문을 닫았다. 


여행을 떠날 때면 나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출발한 후 이메일로 잠시 떠나왔음을 알리는 경우가 많다. 어떤 편지는 행선지도 돌아가는 날짜도 밝히지 않지만, 어떤 편지는 떠나는 마음을 적어도 보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가 떠나려는 걸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은 언제나 내게 어디로 가냐고, 언제 올 거냐고, 거긴 왜 가냐고, 뭘 보러 가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알기에 부러 없는 계획을 만들어 말하거나 볼 생각도 없는 무언가를 볼 거라고 대답하곤 했다. 가끔, 아주 가끔 내 마음을 이해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라고,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 싶어."라고 고백한 사람은 당신뿐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떠나는 나를 당신은 이해할까.


난 아주 작은 공항에도 가봤지만 그렇게 텅 빈 공항에 도착한 건 처음이었다. 케플라비크 공항의 첫인상은 그렇게 텅 빈 것이었다. 깊은 공허가 끝없이 펼쳐진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파리에서 온 나는 어떠한 입국 조사도 가방 검사도 받지 않았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공항 직원 같은 사람을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리듯 밖으로 나온 내 앞에 처음 펼쳐진 건 눈 덮인 광활한 평야뿐이었다. 설원 위의 공항에 선 내 앞에는 희미한 지평선이 멀리 펼쳐져 있었다.


레이캬비크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났을 때 붉은 노을 위로 지나가는 경비행기를 보았다. 생떽쥐베리가 생각났다. 앙트완이라는 이름마저 아름답던 그는 왜 사라졌을까. 난 그의 책을 읽을 때보다 먼 하늘에 비행기 하나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볼 때 더 그를 떠올린다. 아마도 내가 그를 동경하는 이유가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니라 비행기를 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그의 삶 때문인 것 같았다. 붉은 하늘에 검은 동체 하나가 흘러가다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과 끝없이 공허한 땅을 보며, 이곳에는 바랬던 대로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때는 하루에 백 통 이상의 업무 이메일을 처리해야 했고, 아침 8시에 회사에 도착해서 밤 12시에야 집에 들어가는 일상을 반복하며 살았다. 그시절 나는 하루하루 늘어만 가는 일, 관계, 소음 등 모든 것에 지쳐있었다. 언제나 열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관리해야 했고, 쏟아지는 메일에 답신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지나서야 내 업무에 손을 댈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서랍 속에 명함이 늘어나 있었고 메일링 리스트도 그만큼 길어졌다. 일과 관계와 말과 거짓이 정지시킬 수 없는 기계가 생산하는 물건처럼 쌓여만 가는 나날이었다.


결국 난 그 모든 현실에서 도망치듯 떠났다. 이것 좀 봐봐, 이것 좀 들어봐, 이것 좀 먹어봐, 이 사람 좀 만나봐, 세상은 이미 꽉꽉 찼는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 더 채울 것이 없는지 끝없이 찾아 헤맨다. 난 그런 사람들 틈에서 더 이상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 여행은 언제나 다른 이의 눈에는 현실 도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여행 이야기를 좋아했다. 여름에  움직이고 가을에 떠나 나를 이해했고, 무엇을 보러 가는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떠나는 나를 당신은 이해하는 것 같았. 당신은 아주 멀리 있어도 교신할  있는 우주선 같았.  전파를 수신할  있는 유일한 사람.


파리에서 레이캬비크로 가는 항공권을 사고 프랑스인 친구에게 설레는 마음을 알렸을 때, 친구가 말했다. "거긴 왜 가? 오로라 보러?"

"오로라를 보면 좋을 거야. 그렇지? 그런데 나는 실은 없는 걸 보러 가. 아무것도 채우지 않아도 되는 텅 빈 공허를."


아이슬란드 하늘 위를 지나는 한 대의 경비행기를 보고 그것에 당신이 타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행기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잠깐 흔들리더니 멀고 먼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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