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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r 31. 2022

풀사이드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살면서 우린 모든 일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그저 가장자리에 머무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풀사이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풀이 아니라 풀사이드. 

그러니까 수영장 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물 밖 테두리를 말하는 거다. 마치 시원한 포스터를 넣은 심플한 액자처럼, 맑고 푸른 직사각형 수영장의 풀사이드가 나는 좋다. 하지만 모든 풀사이드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풀사이드는 실외여야 하고 규모가 작은 풀장에 사람이 드물고 드문 드문 썬베드가 놓인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런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새소리와 사이드 테이블에 주스잔을 내려놓는 소리만 가끔 들려야 한다. 맑은 날이지만 키 큰 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 적당한 그림자를 드리워주고 여인의 손길 같은 산들바람이 부는 날이면 좋겠다. 


여행을 준비할 때 제일 스트레스받는 것이 아마도 항공권과 숙박을 선택하고 예약하는 일 아닐까. 적절한 가격과 스케줄이 맞는 항공권을 찾는 게 우선인지 내게 맞는 숙박시설을 먼저 예약하고 체크인 날짜에 맞게 도착하는 항공권을 찾는 게 맞는지는 그야말로 정답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는 모두들 어느 정도의 스케줄 내에서 항공권과 숙박을 동시에 검색하고 가장 최선의 조합을 찾아낼 것이다. 

포르토에서 급하게 마데이라행 항공권과 숙소를 찾는 건 온종일 고역이었다. 3월에 그렇게 비가 많이 올 거라 생각지 못했던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2주간 내리는 비에 지쳐 마데이라에 가기로 했다. 바다 건너가는 섬이었지만 검색 결과 마데이라는 계속 날씨가 맑을 걸로 일기예보가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포루토의 숙소에서 마데이라의 숙소들을 검색했다. 긴 비에 우울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햇살 찬란한 휴양지인 마데이라에서는 정말 마음에 드는 호텔에 머물고 싶었다. 나는 정원도 예쁘며 풀장이 있는 곳을 찾았다. 단, 그 풀의 크기가 아담해야 한다. 작은 수영장에 썬베드 몇 개가 줄지어 놓인 풀사이드를 원했다. 그런 풀사이드라면 썬베드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생각도 많이 나고 글도 잘 써질 것만 같았다. 마데이라는 볼게 많은 아름다운 섬이지만 난 자연경관 때문이 아니라 오직 호텔 풀사이드 때문에 그 먼 섬에 가는 셈이었다. 북아프리카 위에 있는 작은 섬에 오직 호텔에서 쉬기 위해 가는 나는 그밖에 섬에서 가볼 만한 곳을 찾는다든가 맛집을 찾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맑은 햇살 아래에서 쉬는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호텔에서 나는 풀장부터 찾았다.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오늘 오후는 오랫동안 풀사이드에 있어보자고 마음먹고 책과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파도치는 바다가 아니라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영장의 푸른 수면과 간지럽히는 듯 부드러운 바람소리가 나를 반겼다. 적어도 내게는 이 썬베드가 오늘은 어떤 의자보다 완벽하다. 


따뜻한 태양과 부드러운 바람과 고요함에 기분 좋을 무렵 다른 손님 세 명이 풀장에 왔다. 그들 또한 손에는 커다란 타월과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었다. 그중 선글라스를 끼고 누워서 선탠을 하던 여자 손님이 수영을 하려는지 풀사이드에 서서 발끝부터 물에 담그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움직임이 어찌나 슬로 모션 같은지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물에 들어가고 아무도 없는 풀에서 혼자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유히 평영을 했는데 풀장의 끝이 수평선처럼 보였다. 햇빛에 눈이 부셔 그녀가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수영을 하는 동안 풀사이드에는 나 말고도 두 명의 노부부가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어딘가에 스며들듯 수영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풀사이드의 우리도 풀장 속의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가 조용히 고여있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실크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고 난 문득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백발의 노부부와 눈이 마주쳤고 우린 서로 눈인사를 나눴다. 우린 마치 물에 안 들어가고 풀사이드에만 있어도 행복함을 느끼는, 어떤 풀사이드 클럽의 회원 같은 느낌이었다. 문득 풀사이드 클럽이라는게 진짜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영장에 왔지만 물에는 안 들어가고 풀사이드에만 있는 사람들의 모임 말이다. 그건 마치 앞구르기 클럽처럼 정말 그런 모임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게 만들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우리 클럽 회원들끼리는 세계 어느 수영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서로 은근히 알아볼지도 모른다.


식당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냄새가 풍겨올 때까지 풀 사이드에 있었다. 정물화 같은 하루가 지고 있다. 백발의 부부도 수영하는 그녀도 썬베드에 앉아있는 나도 지금 이 순간으로 충분할 것이다. 

살면서 우린 모든 일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그저 가장자리에 머무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는 것이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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