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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Apr 09. 2022

어김없는 것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그날 우리에겐 보리차 같은 공기와 해면 같은 햇빛과 두부 같은 마음만 남을 것이다."




프랑스 남부 해안 지역, 꼬뜨 다쥐르는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하기 정말 좋다. 특유의 청명한 날씨와 바닷가에 위치한 여러 아름다운 도시들을 들리며 달리다 보면 그저 차창 밖으로 내민 손등에 스치는 바닷바람 만으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꼬뜨 다쥐르엔 쉬르 메르라는 단어가 포함된 이름을 가진 두 개의 마을이 있다. 그중 하나는 빌 프랑슈 쉬르 메르로 아주 아름다운 작은 항구 도시이자 꼬뜨 다쥐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고, 또 하나는 카뉴 쉬르 메르인데 이곳은 르누아르의 작업실이 있어서 유명하다. 그날 나는 단지 그 르누아르 작업실 하나를 보고 싶어서 카뉴 쉬르 메르로 발길을 돌렸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르누아르의 작업실은 생각보다 큰 규모에 먼저 놀라게 된다. 거대한 올리브 나무가 가득한 언덕 위에 돌로 만든 집은 숲 속의 소박한 작업실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분명 예술적인 느낌은 가득한 곳이었다. 이토록 날씨가 좋고 풍경이 좋은 곳에 이렇게 넓고 훌륭한 작업실이 있는 걸 보고 나는 르누아르의 작품과 그의 공간에 대한 느낌보다는 그가 부유한 삶을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할 수밖에 없었다. 높은 층고와 말끔한 벽, 마음에 드는 테라조 바닥과 맨질맨질한 돌 난간의 느낌 등 그 건물은 분명 내 취향이었지만 내게 가장 큰 인상을 심어 준 것은 작업실보다는 밖의 올리브 나무들이었다. 저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몇 백 년을 살아온 듯한 커다란 나무들이 맑은 햇살을 감고 묵묵히 서있는 언덕. 나는 르누아르의 작업실보다 그 빛나는 언덕이 탐났다.


 언덕에는  번의 계절이 지나갔을까. 그리고  번의 계절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나무들은  자리를 지킬까. 르누아르의 작업실을 떠올리다 달력을 보니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이 지났다.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인데도 지독한 알레르기 비염 환자인 나는 매일 미세먼지 농도를 체크하고 있다니. 정말 투명하게 맑은 날이 절실하게 그리운 요즘이다. 절기를 생각하면 옛날 사람들의 천문학이나 기상에 대한 지혜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어떻게  옛날에 절기를 생각하고 정확하게 날짜를 지정했을까. 계절과 자연의 변화는 그야말로 정말 어김이 없다. 신기한  사람들과 사람들이 만든 모든  항상 예외가 있는데 계절과 자연의 변화는 어김이 없다는 것이다. 어김이 없다는 것은 안심할  있다는 . 약속이 바뀔 리가 없고 반드시 그렇게  거라는 든든한 믿음이다. 가끔 그런 믿음을 주는 말이나 대상을 만났을  우리는 불안이 줄어드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사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미래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될지 알지 못하는 . 그런 불안함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내는 많은 걱정들을 안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함을 느끼는  어려운 것이다. 나는 오래전 어느 방송에서 벤을 타고 여행하듯 사는 부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적이 있다. 출연자   명인 여자분에게 프로듀서가 물었다. "지금 행복하세요?" ", 그럼요! 저는 걱정이 없거든요. 걱정이 없는  행복한  아니에요?" 나는  말이 너무나 와닿아서 아직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우리는 행복이 돈이 많은 상태인지, 사랑이 충만한 상태인지, 원하는 것을 이룬 상태인지,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상태인지 헷갈려한다. 그러나  모든 조건을 아우르는  바로 걱정이 없는 상태 아닐까.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돈이 없어서 걱정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걱정이고, 이루지 못해서 걱정이며 인정받지 못해서 걱정이기 때문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아무런 걱정이 없다면 불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편안한 상태가 바로 행복한 상태 아닐까. 그렇게 걱정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도움을 주는  중의 하나가 바로 어김없는 것들이다. 계절과 절기, 믿을 만한 사람의 약속, 나를 반기는 강아지, 언제 읽어도 감동적인 , 봄의 새소리, 가을의 낙엽, 첫눈 등등. 이처럼 우리 곁엔 알고 보면 어김없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런 어김없는 것들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어김없는 것들을 보는  방해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걷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대부분 탐욕에서 비롯되는데 그런 물건과 욕심과 감정과  등을 없애면 비로소  밑에서 어김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렇게 어김없는 것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느낌이 좋다. 생활을 단순화시키면 얻는 것들인데 그러한 어김없는 것들을 통해 걱정이 조금씩 줄어드는  느낀다.


르누아르는 저 올리브 나무들 사이를 거닐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 시절의 예술가가 지금의 예술가보다 행복했다면 그 이유는 아마 지금의 예술가들은 너무나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 아닐까. 만일 르누아르가 살던 시절처럼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없고 그에 따라 선택해야 할 요소도 적고 사람도 적고 의견도 적다면 걱정은 줄어들고 어김없는 것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그러나 사랑은 어김없지 않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가 그토록 쓸쓸하게 들렸던 이유는 대부분의 사랑이 변한다는 걸 우린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 년 내내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인 카뉴 쉬르 메르에서, 어디 있는지 모르는 당신을 한 계절만 있는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가 늙어서 무릎에 힘이 없는 날, 그때에도 어김없이 봄이 오면, 그 해 봄엔 커다란 올리브 나무 아래 의자 두 개 펼쳐 놓고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녁에는 뭘 먹을지 고민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걱정 없는 그런 하루였으면 좋겠다.  

그날 우리에겐 보리차 같은 공기와 해면 같은 햇빛과 두부 같은 마음만 남을 것이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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