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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r 31. 2022

바바라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비행기 로맨스라는 건 어쩌면 눈 떠야 할 시간이지만 깨기는 싫은 꿈 같은건지도 모른다."




비행기 기내에서의 소음은 어떤게 있을까. 희미하게 들리는 엔진 소리, 에어컨디셔닝 소리, 승무원의 발자국 소리, 앞자리에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소리, 카트에서 음료를 따르는 소리, 어쩌면 좌석 운이 안좋다면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중에 가장 다정한 소리는 무엇일까. 추가로 시킨 와인이 내 앞에 놓여지는 소리일까. 달콤한 잠결에 들리는 블랑켓이 부시럭 거리는 소리일까. 하지만 그렇게 익숙한 소리들 말고도 누구나 꿈꾸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비행기 로맨스가 시작되는 소리다.


"하이."

내가 그녀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고, 그녀로부터 처음 들은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곱슬머리에 마른 몸매였고 안경을 썼으며 마치 어린왕자의 옷을 연상케 하는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고고학자이거나 예술가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두 좌석 라인에 나는 복도 좌석이었고 그녀는 창가 자리였다. 먼저 앉아 있던 내가 길을 터주기 위해 일어나서 앉으라고 손짓을 하니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창가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창밖은 흐렸지만 그녀의 코트깃에 달린 황금빛 브로우치가 반짝거렸다.


시간을 되돌려 아침 6시의 포르토 공항 로비로 돌아가보자. 한달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내리던 비 때문에 나는 중간에 햇빛을 찾아 마데이라로 떠났었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고 다시 포르토로 돌아온지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친구가 이태리의 볼로냐 북페스티벌에 온다는 말을 듣고 나니 평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 북페어를 꼭 보고 싶었다. 얼마나 환상적인 그림책들이 많을까 생각하니 긴 우중 여행으로 우울해졌던 마음이 봄빛처럼 설레는 걸 느꼈다.


포르토를 떠나는 . 새벽부터 일어나 짐을  챙겨놓고 커피를 마시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푸른 새벽. 포르토는  이토록 푸를까. 흐린 3월의 포르토는 해가 뜨고  후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았다. 어쩌면 포르토의 상징 색인  푸른색도 공기 자체가 푸른빛이어서 그렇게   아닐까 싶었다. 물에 잉크를 풀어놓고 이틀 동안 잊었다가 다시 발견한  같은 푸른빛이었다. 푸른 철로를 따라 전철이 달렸다. 이른 아침인데도 배낭이나 캐리어를  관광객들이 많았다. 모두가 공항에 가는 길임이 틀림 없었다. 신기하게도 한국에서의 보통 일상에서는 여행자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데 여행중일 때는 여행자들이  보인다. 여행자끼리는 텔레파시 같은  통하는걸까. 나는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했고 쉽게 보딩할  있을  같았다. 그러나 카운터에 가서  짐을 맡기려는 순간 항공사 직원으로부터 어이없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순간 나는 예기치 못한 커다란 고난이 내게 닥쳐왔음을 알았다. 눈앞에 먹구름이 잔뜩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손님. 손님의 비행편은 취소 되었습니다.”

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재차 물었지만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문자도 받지 못했는데 무슨 일이냐고 하자 자기들은 카운터 직원이라서 이유는 모른다며 사무실로 가보라고 했다. 사무실은 가까웠지만 그곳까지 가는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죄송합니다. 손님의 행선지인 볼로냐로 향하는 비행기는 취소되었습니다. 오늘 중에 꼭 가셔야 한다면 근처 제일 가까운 도시인 밀라노행 비행기표를 구해드리겠습니다. 취소된 비행기편에 대해서 클레임을 걸고 싶으시면 나중에 회사로 이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항공사 사무실 직원으로부터도 취소 사유를 들을 수 없었다. 아마도 유럽 저가 항공사들 비행편에서 종종 생기는 사고 같았다. 그래도 그나마 밀라노행 비행기표를 준다고 하니 나는 그거라도 받아서 밀라노에 가서 기차를 타고 볼로냐로 이동해야만 했다. 오늘 안에 볼로냐에 도착하지 않으면 내일 북페어 시작 시간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예약해놓은 숙소의 숙박비도 손해를 볼 것이 틀림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밀라노행 비행기는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었다. 내 좌석은 두 좌석 자리의 복도쪽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포루투갈 여성으로보이는 한 여인이 내 옆에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그녀는 내 옆에 앉게 되었고 그녀는 앉자마자 책 한 권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큰 일을 치룬 사람 같은 나와는 달리 무척 안정되고 편해 보였다.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 우리는 자연스럽게 몇 마디 주고받게 되었다. 실은 자연스럽게 라기 보다는 내가 말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찰칵! 누가 한국에서 구입한 아이폰 아니랄까봐 내 폰의 셔터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책을 편 채 잠이 든 옆자리 여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그녀에게 내 폰을 보여주며 말을 했다.


"이것좀 보실래요? 제가 당신 사진을 찍었습니다. 실은 제가 한국에서 온 작가인데요, 괜찮으시다면 이 사진을 제가 보관하다가 나중에 제 책에 삽입해도 될까요?"

"아 그렇군요! 네 그러세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가 사진을 찍었다는 걸 그녀에게 알리고 정중하게 허락을 받는 태도에 대해 좋게 느꼈던 모양이었다.

“실은 저는 밀라노를 가는 길이 아니에요.”

“그래요? 저도 그런데요. 호호.”

난 그녀의 대답에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혹시 볼로냐행?”

“네 맞아요. 캔슬됐죠.”

어깨를 으쓱하며 캔슬 사태를 말하는 그녀의 입술이 마치 책을 반납 받는 도서관 사서처럼 차분하게 보였다. 나는 같은 비행기 였다는 걸 알고는 함께 분노할 동지를 만난 마음에 흥분했는데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캔슬이 되면 이유나 이후 조치에 대해 승객들에게 미리 문자메시지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녀는 처음이 아닌 듯 했다. 그녀가 맞장구쳐줄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니 항공사에 대한 불만 토로는 이정도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이제 난 그녀의 직업이 무엇인지, 왜 볼로냐에 가는지 궁금했다. 오늘 이 시간에 일 때문에 볼로냐에 간다면 작가나 일러스트레이터거나 아니면 편집자이거나 기자 등 출판 관계자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예상대로 그녀는 출판 관계자였다. 그녀는 저작권 매니저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볼로냐 북페어에 갈 이유가 충분하겠구나 생각했다. 우린 그렇게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었지만 내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갈만한 재주가 없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우리도 다른 승객들처럼 조용해졌고 어색한 침묵은 곧 잠을 청하는 것으로 대신되었다. 그녀도 볼로냐에 간다면 비행기가 밀라노에 도착하면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간 뒤 다시 기차를 타고 볼로냐로 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행기가 밀라노 공항 활주로에 착륙할 때 내 가슴은 뛰고 있었다. 북페어에서 만나자고 시간 약속을 해볼까,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하고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나는 포기하고 그냥 공항 밖으로 나와서 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그녀가 보였다. 그녀도 버스를 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모른 척 하며 제일 앞에 있는 기차역행 버스를 향해 가는데 그녀가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 다른 버스로 향하는 걸 보았다. 그녀도 날 본 것 같았는데 혹시 날 피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영화 러브어페어에서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이 만나던 비행기 씬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워렌 비티가 아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오래전에 경험했던 비슷한 만남을 떠올렸다. 북경에서 경유한 비행기에서 탑승한 한 여인이 내 옆자리에 앉았고 우리는 쮜리히에서 서로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 이후 이메일을 한 번 주고 받았을 뿐이지 진전되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이번이 내게는 두 번째 경험이었고 두 번 모두 착륙 후에는 로맨스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는 다음 날 북페어에서 저작권 매니저들의 공간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찾는데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볼로냐의 한 카페에 앉아서 와인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랠 뿐이었다. 그녀가 내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던 목소리가 기억났다. 바바라.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그저 비행 시간 동안 조금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로맨스라고 하기는 힘들겠지만 왠지 버리지 못하는 메모지 한 장 정도의 특별한 추억이라고 생각하자. 크리스마스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는 것만큼, 갑자기 캔슬된 항공기 때문에 다른 항공기에서 같은 행선지 여인과 함께 앉는 일도 쉽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니까. 비행기 로맨스라는 건 어쩌면 눈 떠야 할 시간이지만 깨기는 싫은 꿈 같은건지도 모른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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