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에 나는 매우 기이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평소에는 궁금하지도 궁금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미치도록 알고 싶은 것이었다. 나에게 이 경험은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달콤하면서도 초콜릿 같은 씁쓸한 맛을 주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는 지난해 여름휴가 기간에 여자 친구와 경주로 여행을 가려고 경주 여행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경주 여행은 보통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떠나는 대표적인 수학여행 코스였다. 나에게 경주는 유적지와 문화재 관심보다는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기에 열을 올렸던 기억밖에 없는 장소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 경주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여행 관련 블로그부터 관광홈페이지까지 살폈다. 그런데 경주에 있는 유명한 맛집과 숙박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는데 정작 유적지와 문화재에 대한 정보는 단편적이고 중복되었다. 그나마도 정보 사이에 오류도 보였다. 나는 학교 다닐 때도 없었던 학습 의욕에 생겨났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수업 시간에만 들었던 경주에 관한 유적지와 문화재를 제대로 공부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불국사, 석굴암, 태종 무열왕릉 비, 황룡사지 터, 분황사 모전석탑, 첨성대가 이번 여행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볼 대상이다. 관련 전문 서적을 찾아보려고 시립도서관에 갔다. 여행 관련 도서로 갈까, 역사 관련 도서로 갈까, 고민이 되었다. 도서 검색에서 경주,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를 입력하자, 모니터에 나타난 관련 도서는 너무 많았다. 그래도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역사 관련 도서로 가서 느낌이 오는 책을 고르기로 했다. 평범하지만 무난한 제목의 책들을 골랐다. ‘불국사의 모든 것’, ‘석굴암에 대한 101가지’, ‘태종 무열왕 김춘추’, ‘선덕여왕과 황룡사’. 그런데 첨성대에 관한 책을 고르다가 눈에 띄는 제목이 보였다.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었다’. 뭐라고,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고? 첨성대는 천문대라고 학교에서 배웠는데 이게 뭐지? 책 제목이 매우 자극적이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책의 크기도 작고 책의 두께는 얇았다. 우선 책의 두께가 얇아서 마음에 들었다. 고른 책을 대출하는데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었다’ 책은 자꾸 오류가 떴다. 직원도 ‘이상하네’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여러 번 도서 바코드 리더기를 대며 애를 썼다.
“이 책은 대출하기 어렵겠네요.”
“꼭 대출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안에서 밖의 상황을 파악하였는지 나이가 지긋하신 직원이 나와서 프로그램을 몇 번 조작하더니 대출이 되었다. 그분이 나를 보고 미소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진귀한 책을 찾아내다니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허허.”
대출한 책을 가지고 집으로 갔다. 경주 여행은 내일이다. 뭐부터 읽을까 하는데, 역시 제목부터 강력한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었다’에 손이 갔다.
책의 저자는 홍범준. 경주대학교 문화재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인 고고학자. 저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책을 출판한 곳은 ‘소설편의점’이라는 출판사였다. 어~ 소설편의점이라고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네. 그럼, 주로 소설을 취급하겠군. 이 책도 소설인가? 분량은 80페이지 정도인 신국판 크기의 책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학술 내용을 정리한 것인지, 소설인지 모호하게 구성되었다. 이 책의 구성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이루어졌는데, 전반부는 첨성대에 관한 학계에 보고된 여러 학설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후반부는 저자의 연구 내용을 소설 형식으로 제시했다.
첨성대는 불국사, 석굴암과 함께 경주 문화재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국보 제31호. 첨성대 관련 최초의 기록은 고려 때 승려 일연이 남긴 <삼국유사>(1281) 에서 볼 수 있다. ‘선덕왕 지기삼사’에 선덕여왕 대에 건립되어 있다고 나온다. 그런데 먼저 지어진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는 633년(선덕여왕 2년)에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첨성대의 위치와 설립 연대, 재질과 크기 그리고 ‘그 안이 통해 있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 발간된 자료 <신증동국여지승람>(1481)에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천문을 물었다.’라는 문구만 덧붙였다. <동사강목>(1781)에는 신라의 첨성대에서 ‘천문을 묻고, 요사한 기운을 살폈다.’라고 되어 있다. 그 밖에도 <고려사>(1451), <서운관지>(1688), <증보문헌비고>(1790)에서도 첨성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첨성대는 현재 경주 반월성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높이가 9.1m, 밑지름이 4.93m, 윗지름이 2.85m이고, 기단석으로부터 높이 약 4.16m 되는 곳에 거의 정남쪽으로 1변의 길이가 약 1m의 정사각형의 창문이 나 있으며 상방하원(上方下圓)의 형상을 갖춘 돌탑 형식으로 축조되었다. 여기까지는 첨성대에 관한 기록과 실측한 내용이다. 저자는 책에서 앞서 열거한 내용이 첨성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토대라고 말했으며, 이러한 토대 위에 다양한 학설이 나왔지만, 저자는 모두 틀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 번째 학설은 ‘천문대설’이다. 이러한 해석을 처음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 근무했던 일본인 와다유지다. 그는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 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건물을 세우고 혼천의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첨성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동양의 천문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나왔다. 또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첨성대가 방위와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의도적으로 일출 방향과 맞춘 것으로 24절기를 알아내는 목적으로 사용했으며, 첨성대 건립 이후 천문 기록이 10배나 증가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설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관측을 위해 매일 교대로 오르내리는데 불편한 점이 많고, 그 위에 목조건물을 세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꼭대기에 널판을 깔고 측량기구를 설치했다면 별도로 따로 만들어야 하므로 상설 천문대로 사용했다고 볼 수 없다고 보았다.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일본인이 제시한 학설을 그대로 받아 그 의미를 확충한 정도일 뿐이며,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배운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며 이어왔기 때문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두 번째 학설은 ‘상징물설’과 ‘제천단설’이다. 이러한 학설은 1960년대에 들어서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는 근거로 제기된 설이다. 첨성대가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은 아니며, 다만 수학 및 천문학에 관한 당대의 권위서였던 <주비산경>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축조한 상징적인 탑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을 닮았다는 사실에 착안해 불교의 영산인 수미산을 형상화한 불교적 용도의 제단이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러한 학설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주비산경>은 한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수학과 천문학을 다룬 것이지만, 궁궐터에 세워질 이유와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뜬금없는 주장이라고 보았다. 불교적 용도의 제단이라는 주장은 신라가 신봉하는 종교가 불교라는 점을 고려할 때, 타당한 학설이라고 볼 수 있으나 종교 관련 건축물이 사찰에 지어지지 않고 궁궐터에 덩그러니 건립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 외의 학설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와 같은 제단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지나친 비약과 억측이라고 일축했다.
저자는 첨성대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시작했다.
때는 600년.
신라 26대 진평왕은 삼국의 다툼 속에 신라를 강건히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24대 진흥왕)를 이어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숙부(25대 진지왕)에게 왕위가 승계되었다가 4년 만에 폐위되는 바람에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그는 왕권을 안정적으로 승계할 방안을 늘 고민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최측근인 상대등 수을부와 동생 백반과 국반을 불러 이를 논의하였다.
“그대들은 짐이 어떻게 왕위에 오른 지 잘 알고 있으렷다.”
“네, 폐하!”
“법흥왕 이후 직계 후손이 왕위를 이어오면서 왕권이 안정되었고,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우리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소. 그런데 숙부에게 왕위가 승계되었을 때 신라는 잠시였지만, 위험에 처했소. 그래서 이를 막고자 왕위 승계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려고 하오.”
“그렇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옵니까? 폐하, 명하시면 받들겠나이다.”
“왕위 계승이 형제에게 승계되는 것을 막고 직계 후손에게만 승계되도록 하려하오.”
“폐하! 그러면 다른 왕족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폐하!”
“그래서 그대들을 부른 것이오. 짐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는 강력한 신라를 만드는 매우 중요한 일이오. 허니 화백회의에서 이 법령이 통과될 수 있도록 그대들이 노력해 주게.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도 좋네. 이 법령은 성골(聖骨) 왕위 승계법이라고 명하겠네.”
한 달 뒤. 화백회의에서 성골(聖骨) 왕위 승계법이 통과되었다. 그날 화백회의가 있던 건물 주변에는 왕의 근위대가 에워쌌다고 전해졌다. 진평왕은 왕위 승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지만, 왕위를 승계할 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부인 마야와의 사이에서 세 딸이 태어났다. 첫째 딸 덕만공주, 둘째 딸 천명공주, 셋째 딸 선화공주. 셋째 딸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의 왕비가 되었다. 둘째 딸 천명공주는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과 혼인하여 김춘추를 낳았다. 첫째 딸 덕만공주는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다. 진평왕은 덕만공주를 일컬어 ‘만일 덕만공주가 딸이 아니라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왕위를 계승할 만한 재목이다.’라고 말하며 늘 안타까워했다.
때는 622년.
진평왕은 자신의 몸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끼면서 왕위를 이을 왕손을 얻지 못해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왕위를 승계할 왕재, 아들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탑을 건립할 것을 명했다. 탑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들은 셋째 딸 선화공주는 백제의 석공 아사달의 손자 아스더를 신라에 보냈다. 석공 아사달은 법흥왕 때 지은 불국사의 석가탑을 만든 사람이다. 진평왕은 석공 아스더를 불러 석탑에 관해 설명했다.
“이번에 건립될 석탑은 성골(聖骨) 왕족의 번성과 신라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네. 그러니 잘 부탁하네.”
“네. 폐하! 그러면 탑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별과 같이 고귀하고 빛나며 훌륭한 성골(聖骨) 후손의 탄생을 기원한다는 의미를 지닌 ‘첨성대(瞻星臺)’라고 하겠네.”
“네. 폐하! 성심을 다해 황명을 받들겠나이다.”
석공 아스더는 첨성대를 만들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하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독특한 모양의 석탑을 구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첨성대에 관한 고민으로 잠이 오지 않아 연못을 거닐었다. 밝은 달을 보니 고향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조부모 아사달과 아사녀도 생각이 났다. 조부 아사달은 백제 최고의 석공으로 신라 법흥왕 때 김대성의 부탁으로 석가탑을 만들었다. 조부의 석가탑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비례가 아름다우며 균형을 갖추었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탑이었다. 자신도 그런 탑을 만들고 싶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균형을 갖추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탑이라. 그의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아스더는 땅에 그 모양을 그렸다. 원형의 모습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작아지고, 안정감을 위해 아래와 위는 사각형으로 마감하고 앞뒤 구분을 나타내는 작은 창문을 냈다. 별의 기운을 받기 위해 위는 막지 않고 별의 기운을 품고자 내부는 비워두기로 했다. 그는 다음날부터 탑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의 석탑과 달리 원형으로 돌을 쌓는 방식이어서 여러 차례 무너지기도 했다. 적당한 크기의 돌을 고르고 다듬고 쌓는 일은 고도의 숙련된 석공이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진척 과정을 바라보는 진평왕은 어서 빨리 완공할 것을 독려했다. 그러나 첨성대 완공을 못 보고 진평왕은 숨을 거두었다.
때는 632년.
제26대 진평왕이 승하하자, 새로운 왕을 추대하는 일에 문제가 발생했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왕위 승계는 남자만 하였다. 그런데 성골(聖骨) 왕위 승계라는 법령에 따라 진평왕의 직계 후손만 가능했다. 남아 있는 진평왕의 직계 후손인 세 명의 공주 중에서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의 왕비가 되었고, 천명공주는 김춘추를 낳고 이미 죽었다. 남은 공주는 덕만공주뿐이었다. 새로운 왕 추대 논의가 시작되었다. 남자냐, 성골이냐의 선택이었다. 결국 진평왕이 만든 성골 왕위 승계에 따라 덕만공주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것으로 화백회의에서 결정했다. 그렇게 덕만공주는 신라의 첫 여왕이자 제27대 왕이 되었다. 즉위한 선덕여왕은 아버지 진평왕을 이어 신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길러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해야 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선덕여왕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민심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진평왕 때 만들기 시작한 첨성대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첨성대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거치고 이제 첨성대는 거의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폐하! 첨성대를 완공하였나이다.”
“오오! 진정 첨성대를 완공하였는가. 선왕께서 이를 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수고했네. 정말 고생이 많았네. 그대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많은 금과 땅을 하사하겠네.”
“폐하! 황공합니다. 소인은 저를 기다리시는 늙으신 부모님께 어서 빨리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렇지. 그대는 백제 사람이었지. 그대는 돌아가거든 내 동생 선화공주에게 안부를 전해주게.”
“네. 폐하!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첨성대는 마침내 완공되었다. 때는 634년 선덕여왕 2년이었다.
저자의 소설은 이렇게 끝났다. 그리고 첨성대에 관한 저자의 간략한 후기가 뒤에 이어졌다.
성골(聖骨)이라는 왕위 계승을 상징하면서 신라의 무궁한 번영과 발전을 담은 첨성대는 그렇게 우리에게 남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첨성대에 담긴 간절한 소망과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선덕여왕은 세 번 결혼했지만, 끝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647년 진덕여왕이 제28대 왕위를 이었으나, 역시 후사 없이 7년 만에 사망했다. 진덕여왕이 죽자, 선덕여왕의 동생 천명공주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손자인 김춘추가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으로 제29대 무열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책의 내용을 마지막까지 읽고 난 후, 나는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이토록 놀랍고 기이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 저자의 첨성대에 관한 이야기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전해오는 다양한 설화와 저자의 기발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창조물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첨성대에 관하여 이렇게 흥미로움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했다. 아마 경주에 간다면 첨성대를 다시 바라볼 것만 같았다. 여자 친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궁금했다. 여행을 떠나는 날. 짐을 챙기는 과정에서 어제 읽었던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었다’라는 책이 보이지 않았다. 책상과 가방을 샅샅이 찾았는데 책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여자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자, 책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을 나왔다. 경주로 가서 첨성대를 방문했다. 나는 여자 친구에게 책에서 읽은 내용을 말했더니 여자 친구는 매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책을 찾아봤지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대출한 책을 반납하면서 분실한 책이 있다고 직원에게 말했다.
“그런 책은 대출되지 않았는데요. 오늘 반납한 책들이 그날 대출된 책들입니다. 말씀하신 그 책은 우리 도서관에 없는 책입니다.”
“네? 그런 책이 없다고요. 그날 나이 지긋한 분이 나오셔서 책을 대출해주셨는데....”
“나이 지긋한 분이라고요? 그럼 박 부장님을 말씀하시나?”
“그분 성함은 모르고요. 그 책을 대출하는데 자꾸 오류가 났어요. 그래서 그분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요? 박 부장님! 나와보세요!”
안에서 나온 박 부장님이라는 사람은 내가 봤던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벗겨지지도 않았고, 키가 작지도 않았고, 게다가 뚱뚱하지도 않았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아닙니다. 제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미안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황급히 도서관을 나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책도 사람도 모두 사라지다니. 나는 핸드폰을 꺼내 책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 찾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라고 나왔다. 저자 홍범준을 검색했다. 동명이인의 사람만 나오고 내가 찾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소설편의점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 찾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라고 나왔다. 나는 허탈했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다른 단어를 넣어 검색하면서 관련 내용을 찾아봤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킬 겸해서 도서관 앞 커피전문점 ‘늘 언제나’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을 빨았다. 머리가 맑아지면 약간은 진정되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경험한 것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기이한 경험을 하고 신비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왠지 모르게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리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창가에 혼자 앉아 책을 보는 여인이 눈이 띄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은 내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그책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