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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밤

<<소주>> 서울의 밤

by 빛나는

답답함이 목까지 차올라 이유 없이 훌쩍 떠나고 싶은 날에는 핸드폰을 열어 대한민국 지도를 펼쳐본다. 집에서 가깝게 갈 수 있는 장소가 어디 있을까.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다 보면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도시가 있다. 그럼 곧바로 그곳으로 바람처럼 날아간다.


왜 군산이었을까?

울적했던 그 날에 친구가 맛있게 먹었다던 매콤한 고추 짜장면이 문득 떠올랐던 것 같다. 엄청 매워서 눈물, 콧물 쏙 빼면서도 그릇을 싹 비웠다던 말이 머리에 남았나 보다. 즉흥적으로 새벽에 고속도로를 달려 해 뜰 무렵에 군산에 도착했다.


고요한 아침부터 습습 소리를 내며 짜장면을 먹었다. 일품요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행길 요기로는 충분했다. 예스러운 기찻길을 구경하고, 유명한 야채빵도 가득 담아 차에 실었다. 할 건 다 했는데 뭔가 부족한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아, 술을 안 마셨구나!


일본식 가옥이 남아있는 동네에서 작은 이자카야를 발견했다. 지금은 이름이 생각나질 않지만 얼큰하게 취했던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만족했던 게 분명하다. 마당에 꾸며진 정원이 고즈넉하니 예뻤던 술집이었다.


아무리 날이 쌀쌀해도 희뿌연 서리가 끼어있는 술병을 마주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법. 뚜껑을 따라락 돌려 열자 상큼한 매실 향이 훅 들어왔다. 해산물 안주에 한 잔 곁들이니 술이 그냥 술술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높은 도수는 잊은 채 1병, 2병... 빈 병이 늘어났다. 자유를 갈망하던 나는 드디어 고삐가 풀려버렸다.


왜 서울의 밤이었을까?

아늑한 타지의 달빛 속에서도 결국엔 둥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숨어있었나.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는 걸 무심결에 알고 있었나. 아니면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눈치껏 적절한 금액대의 소주를 골랐었나. 이제는 알 수 없는 그때의 마음.


당시에는 너무 맛있는 술이라고 외쳤지만 정작 그 이후로는 마셔본 적이 없는 소주, 추억 속에 남은 건 오직 그날의 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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