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가마 속에는 고운 황토로 만들어진 도자기들이 들어있다. 장인은 장작 한 무더기를 가져와 안으로 더 넣는다.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며 온도를 높인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1250도, 여기서 깨지지 않고 견디는 그릇만이 작품이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예전에도 이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장면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고난 속에서 견디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빛을 본다는 뜻이었다. 그때는 별 감흥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는데, 이제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나는 원래 뭔가 재미있어 보이면 당장에 달려가는 성격이었다. 친구들은 도전정신이 강하다고 손뼉을 쳐주기도 했다. 그 말에 우쭐해져 여러 취미에 발을 담갔다. 시도한 많은 분야에서 꽤 감각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항상 괜찮은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지망생으로 시작한 일은 유망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냥 '앞으로가 기대가 되는 사람'으로만 끝났다. 모두 내 끈기가 부족한 탓이었다. 쉽게 불타오른 열정은 금세 꺼져버렸다.
사회생활을 하며 책임감을 배웠고 조금씩 엉덩이가 무거워졌다. 진득하게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그동안 숱하게 맛만 보고 말았던 일들에 회의감이 몰려왔고, 내 성향에 대해 감지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흥미를 쫓는 사람이 아니라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도망을 쳤던 것이다. 어디에서나 가능성이 많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 나를 어설픈 다재다능 자로 만들었다.
속마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에 순응하고 씁쓸한 기분만 어딘가에 감춰두며 살았다. 내 인생에 강제로 브레이크가 걸리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다시금 올라왔다.
아이를 낳고 밖에 나갈 일이 적어지자 안에서 할 일을 찾아 헤맸다.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생산적인 일은 글쓰기였다. 집에서 혼자 끄적거리는 것도 결국 무료해져서 동네 문화센터를 알아보았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갈 수 있는 저녁에 수강할 수 있는 반은 딱 하나였다. 나를 찾는 글쓰기라는 주제의 수필 반이었다. 문학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기에 망설여졌지만 용기를 내서 등록했다. 그곳에서 나는 또 떠오르는 신예가 되었다.
책을 가까이한 적도 없고 관련 전공자도 아닌데 이 정도 글을 쓰다니. 수필이랍시고 쓴 첫 작품을 가져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물론 새로 들어온 수강생에게 해주는 환대의 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집으로 돌아와 나에게 글쓰기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며 남편에게 재잘재잘 떠들었다. 마음으로는 이미 대작가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 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바닥이 드러났고, 사람들의 칭찬은 점점 줄어들었다. 당연히 수업에 대한 즐거움도 사라져 갔다.
재등록할 때가 되어 고민하고 있을 때, 나의 반복적인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항상 거창하게 시작해 놓고 흐지부지 마무리했던 지난날들이 스쳐 갔다. 더는 회피하는 철부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분은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소개해 주었다. 자신이 하는 글쓰기 강의와 함께.
신세계에 눈을 뜨고 어느덧 다섯 달이 흘렀다. 두 권의 브런치 북을 완결했고, 하나의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짤막한 글이지만 여태껏 발행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꾸준히 하고 있다고 자랑할 만한 기간은 아니나 나에게는 거진 한계를 뛰어넘은 일이다. 게다가 브런치라는 공간에도 조금씩 재미를 붙이고 있다. 다른 작가님의 글에 감동받아 짧은 문장을 남기거나, 내 글에 달린 감상평에 답을 하기도 한다. 고정적인 일정으로 잡힌 이 시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직은 감이 오질 않는다.
사소해 보이는 몇 줄의 댓글이 벌써 많은 인연을 연결해 주었다. 그리고 못된 습관을 끊어낼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권태감이 오면 무작정 달아나 버렸던 내가 몇 번이나 고비를 넘기고 여전히 글을 쓰고 있으니. 나도 모르던 글에 대한 사랑을 발견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브런치 식구들의 보탬 덕분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싶고,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좌절감이 몰려와도 펜을 놓지 않게 해 준 힘이 되었다.
1년 전, 수필 반의 문을 두드렸을 때만 해도 대스타 작가로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준비 없이 공모전에 출품하겠다고 마구 나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다고 기초부터 다지고 오겠다는 핑계로 또다시 도전을 멀리하지는 않는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반드시 엉덩이 싸움에서 승리하고야 말겠다.
내 안에서 나오는 문장이 나를 말해준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퍽 좋은 사람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글쓰기를 통해 나를 살피며 다듬어 가는 중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용기를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배경이 없어도 재능이 부족해도 타오르는 열정만으로도 오래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허울뿐인 말이 아닌 나 자신으로 증명해 보이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
근래에 다시 접한 가마 영상에서 이제는 내 모습을 보인다. 큰 소리를 내며 터져나가는 파편이 아니라 잘 빚어진 작품이 되길. 열기에 숨이 막혀와 견디지 못할 것 같아도 함께 하는 이들과 손을 맞잡고 언제까지고 글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