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번 위험에 빠진다. 건강을 위해 끊은 필라테스 수업 시간에도, 집에서 300km나 떨어진 여행지에서도. 물론 집이라고 안전하지는 않다. 내 주변에는 온갖 불길한 예감이 드는 일이 가득하다.
작년 겨울, 허리에 통증이 느껴져 재활 운동을 겸하는 필라테스 센터를 찾아봤다. 마침 집에서 가까운 위치에 새로 개업한 곳이 있어 곧바로 30회를 결제했다. 선생님 프로필을 살펴보려 했는데, 정보가 별로 없었다. 어차피 다 비슷할 거라는 생각으로 수업 날을 기다렸다. 새하얀 벽지와 커튼으로 꾸며진 센터에는 아직 손때가 묻지 않은 기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 건물이라 그런지 옅은 시멘트 냄새도 풍겼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얀 티셔츠의 검정 바지 차림. 얼굴에는 굵은 뿔테 안경을 쓴 사람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인사말에 문득 센터 소개 글이 떠올랐다. 강사 OOO. 남자 이름이 분명했는데도 왜 예상을 못 했을까. 필라테스는 당연히 여자 선생님이 가르칠 거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한 시간 정도 이어지는 수업을 끝내고, 다음 예약을 잡고 문밖으로 나왔다. 좀 전에 걸어왔던 복도였지만 어색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공실이 많았었나. 건물의 2층에는 달랑 이 필라테스 센터만 있었다.
갑자기 이곳에서 운동해도 될지 고민이 되었다. 외진 공간에서 필라테스를 가르치는 남자 선생님. 아무도 입점하지 않은 곳에 센터를 차린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회원들과 친해져 신상을 파악한 뒤, 혼자 사는 사람이면 헤치려는 게 아닐까. 아무리 소리쳐도 누군가에게 닿지 않고, 운동 중이라 손에 핸드폰도 없을 테니. 깔끔하게 정돈된 센터도 혹시 뭔가를 다 치웠기 때문인가. 만약 내가 그 표적이 되면 어쩌지. 수업이 이미 1회가 진행된 상황이라 환불하기도 애매했다. 무엇보다 선생님과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필라테스를 배우는 몇 개월 동안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지만, 긴장감 있는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서 계속 상영 중이었다.
지난여름에는 휴가지에서 또 섬뜩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시아버님의 고향인 울진에 있는 시골집은 깊은 산골짜기에 있다. 주변에는 새카만 소나무만 가득하고, 몇 가구 살지 않는 동네라 늘 적막함이 맴돈다. 옆집과는 낮은 담을 공유하고 있어서 서로의 마당이 훤히 보인다. 누가 나를 지켜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몇 번 방문하니 점점 익숙해졌다.
무더웠던 8월의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시골집 에어컨이 고장 났다. 어쩔 수 없이 밤공기로 열기를 식히기 위해 마당에 앉아 있었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산중이라 그런지 주변이 어두웠다. 희미한 등불 아래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옆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담 너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집중된 시선 끝에는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꽤 더운 날이었는데도 긴 팔에 긴바지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 게다가 운동하는 건지, 뭘 찾는 모양인지 부산스럽게 집 마당을 돌아다녔다. 뭔가 수상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행여 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까 봐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왔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에게 옆집에 누가 사냐고 물어봤다. 시아버님 친구분과 아들 한 명이 있을 거라고 대충 대답했다. 그 아들이구나, 남편처럼 분명 30대나 40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쏟아 냈지만 물기가 남은 귀를 후비며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코를 골며 깊이 잠이든 남편 옆에서, 나는 좀처럼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집에 찾아오면 어쩌나, 상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성인 남자의 허리춤 정도 되는 높이의 담장을 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겠지. 찜통에 들어간 듯한 날에 긴팔을 입은 이유가 뭘까. 장작을 패는 도끼가 나와 있던데, 그걸로 나무만 자르는 게 맞을까. 혹시 아까 내가 훔쳐본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뭔가를 숨기는 중인데 나에게 들켰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목격자를 가만히 놔두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어쩌지. 앞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떡하지. 크게 소리를 질러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 텐데. 당연히 남편 먼저 제압하겠지, 그러면 나는 신고를 해야 하나. 경찰이 올 때까지 30분은 걸릴 텐데 큰일이네. 생각은 멈추지 않았고 머릿속 장면은 계속해서 다음으로 넘어갔다.
힘차게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와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더위, 그리고 담장 너머 그에 대한 상상에 새벽녘쯤 눈을 감았다. 깊은 잠에 빠졌었는지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남편은 보이지 않았고, 방 안에는 고요한 정적만 흘렀다. 설마 하면서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니, 남편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편에게 어젯밤에 떠오른 일을 와다다다 쏟아냈다. 어쩌냐는 말을 연이어하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남편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아주 그냥 소설을 써라!"
남편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 다 범죄자로 만들 거냐고 핀잔을 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주저하다 지난주에 아랫집에서 층간소음으로 올라온 아주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미안한 마음에 과일을 사 들고 방문했지만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며 혹시 칼을 들고 우리 집을 찾아오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고 한바탕 내뱉었다. 하지만 남편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이번 기회에 아예 책을 내지 그래.
타오르던 근심에 연속으로 찬물이 퍼부어지자 마음이 가라앉았고, 이내 냉정함을 찾았다. 그러자 과하게 사연을 만들었던 숱한 날들이 스쳤다. 과연 내가 진짜로 불안했을까, 아니면 망상을 스케치하는 그 시간이 재밌고 몰입되었을까. 스릴러 작가는 어딜 가든 살인이 일어날 장소로 본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글을 쓴다고 돌아다니면서 온갖 것에 의미 부여를 하다 보니 상상력도 풍부해졌나 보다. 아무래도 나는 작가가 될 준비가 되었나 봐. 사소한 일에도 발을 동동 구르며 망상의 세계를 그리는 내 모습에 혼자 피식했다. 사실은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커피를 건네준 사장님이 주인공이 되어 나만의 시나리오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