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유명인이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그 말이 너무 멋있게 다가왔다. 남의 일상에 관심을 갖지 말고, 내 하루를 살아가라는 뜻에 완전히 꽂혔다. 그날 바로 핸드폰에 깔려있던 모든 SNS 어플을 지워버린 뒤,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모두가 인스타로 소식을 나눌 때, 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숨어 지냈다. 요즘 인기 있는 음식이나 장소가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내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얼마 전 동네에서 하는 글쓰기 동아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모임을 이끄는 선생님은 20년 경력의 편집자 출신이었다. 참가 상담을 할 때부터 전문가 다운 면모가 돋보였다. 나는 이 분야의 햇병아리로 지망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함께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갖는 모임은 지금까지 총 4번 진행되었다.
모임의 첫날, 선생님은 멋스러운 무스탕을 입고 왔다. 머리에 안경을 꽂고 내 글을 읽는 모습이 너무 세련되게 느껴졌다. 역시 분위기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주에도 또 그다음에도 선생님은 같은 옷을 입고 나왔다. 베이지색 털이 달린 검정 무스탕. 자세히 살펴보니 가방도 늘 똑같은 거였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매번 다른 외투를 입었다. 심지어 신발까지 모두 다른 걸로 신고 갔다. 화장은 연하게 했지만, 소위 말하는 꾸민 듯 안 꾸민 듯 보이기 위해 애썼다. 전날 무얼 입을지 미리 고민했고, 최대한 이전과 겹치지 않게 골랐다.
세 번째 모임이 끝난 후, 항상 같은 옷만 입고 오는 선생님이 왠지 이상했다. 글만 읽고, 쓰느라 패션에는 관심이 없는 건지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네 번째 만남에 그분은 옷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선생님은 한 영역에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스스로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따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가슴에 딱딱 날아와 꽂혔다. 빨간펜을 잡고 거침없이 밑줄을 긋는 손도 더욱 당당하게 느껴졌다. 그 사이에는 상대를 인정하는 한마디와 배려하는 행동까지 녹아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수업 시간이 지나갔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작년에 퇴직을 하고, 돈 한 푼 못 버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겠다고 여기저기에 기웃거리고 있지만, 아직 생산적인 일은 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역할이 콩알만치 작아졌으니, 자부하던 높은 자존감도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갔을 테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은 행세를 하기 위해 외모를 꾸미고 다녔다. 심지어 너무 치장한 티를 내기 싫어서 더 공을 들여 수수한 사람인체 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허영심은 근래에 나타난 게 아니었다. 예전부터 누구보다 남을 신경 썼고, 은근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지인하고 만나기로 했을 때, 약속 장소가 자동차로 가야 하는 곳이면 괜히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걸 알아챌까 싶어서였다. 혹여 '너무 잘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분수에 넘치는 차를 끌고 온다고 여기지는 않을까'하면서, 혼자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다. 누가 차가 좋다고 말하면 남편과 열심히 벌어서 산거라고 겸손한 척을 했고, 아무 말이 없으면 어떻게든 뽐내고 싶어 했다. 주차장이 멀리 있는 식당에라도 가면 일부러 차키를 꺼내놓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바퀴 네 개를 열심히 굴리며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자동차 한 대를 두고, 내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아우디가 무슨 잘못인가, 내 삐뚤어진 마음이 문제지.
사실 SNS를 하지 않는 건 회피에 가까웠다. 타인에게 휘둘리는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아 무심한 척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리본까지 칭칭 감았다. 겉모습에만 관심을 갖는 친구에게 네 존재를 그대로 사랑하라며 주제넘은 조언을 하곤 했다. 그렇게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길을 가는 쿨한 여성에 빙의해서 여태 살았다. 그런데 과시하기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자아성찰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제목을 아우디로 뽑은 걸 보면, 여전히 허세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 다만 예전처럼 그 마음을 나 몰라라 하고 덮어두지는 않는다. 앞으로는 옷장을 뒤적이는 횟수만큼이라도 내 안을 살피길 바라며, 오늘은 이 정도의 부끄러운 고백만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