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식통에 담은 꿈

by 빛나는

그날은, 출산 이후 처음으로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으로만 채워진 하루였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10시부터 16시까지. 그 사이에 심리학 강연과 글쓰기 수업 그리고 허리 치료 일정이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여러 지역을 오가야 하는 시간표라 중간에 점심을 먹을 틈이 없었다.


끼니를 거르고 싶지는 않아서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기로 정했다. 새벽에 깨서 도시락을 싸는 게 얼마만인지.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주꾸미볶음에 밥을 비볐다. 주걱을 휘젓는 일이 평소와 다르게 신이 났다. 다 만들고 보니 밥을 넣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아이가 이유식을 할 때 쓰던 보온통이 생각나 주방 서랍장을 열었다.


차를 세워둔 곳은 나무가 빽빽하게 주변을 두르고 있는 주차장이었다. 얼마 전 내린 눈이 가지에 소복이 쌓여있었고, 한겨울 바람에 눈송이가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이었나. 문학가들이 겨울을 예찬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운전석에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앙증맞은 그림이 그려진 통에서 매콤한 향이 올라왔다. 아이가 먹을 밍밍한 음식만 담았던 통에는 나를 위한 한 끼가 담겨있었다. 한 숟갈 가득 떠서 입안에 넣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소 궁상맞게 보이는 장면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 내 일상은 늘 같았다. 하루 종일 아이에게 맞춰 움직였다.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집안을 치웠다. 밤에 깔끔하게 정돈된 거실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휑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적막감을 밀어내 보아도, 공허함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길거리에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내 모습이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역할은 뚜렷해졌지만, 정작 나라는 사람은 희미해져 갔다. 인생을 살다 보면 다른 이를 돌보느라 '나'를 잠시 뒤로 미루게 되는 때가 온다고 하는데, 내게는 그 시기가 지금인 듯했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을 붙잡고 싶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전에 했던 상담 자격증 공부를 이어가려 했으나, 경력 공백과 나이가 걸려 조심스러웠다. 최근 글쓰기에 관심이 생겨 배워볼까 싶었다. 하지만 잘 모르는 분야라 선뜻 발을 내딛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이든 결과가 보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자꾸만 주저앉았다. 며칠을 집에서 끙끙대다 결국 문화센터 글쓰기 반의 문을 두드렸다. 부담스럽지 않게 짧은 시간만 진행하는 수업으로 골랐다.


강의 첫날, 나는 꽤 놀랐다. 예상외로 머리가 희끗한 수강생들이 많았다. 자기소개를 할 때는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꿈꾼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수필가로 등단을 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내가 30대라는 말에 너무 젊다며 부러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내 글을 처음 발표했던 때, 모두가 우렁찬 박수를 쳐주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문장 감각이 있다며 계속 글을 써보라고 응원했다. 분명 칭찬인데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곧 마흔이 되는 나이에 지망생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금세 앞날이 기대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선생님이 도전에 대한 주제로 글을 써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덧붙여 본인은 청춘의 패기로 무용을 시작해서 예술의 전당 무대에도 올라봤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20대 시절의 얘기일 거라고 짐작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이 40대에 시도한 일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 말을 듣고 감탄사를 터트린 사람이 나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다들 40~50대만 되어도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계시던 80대 수강생분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도 뭐든 할 수 있어요.”

전부 크게 깔깔거렸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몇 달을 함께하니, 무엇보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글쓰기 플랫폼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온라인으로 심리 세미나를 들으며 조금씩 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서부터는 한 발 더 나갈 용기가 생겼다. 열정적으로 나의 매일을 계획하고, 나의 미래를 그리는 일로 내 세계를 점점 넓혀갔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점심으로 먹었던 이유식 통을 꺼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콧노래가 나왔다. 깨끗하게 씻어낸 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음엔 또 무얼 담아볼까. 아이를 위해 쓰던 통은 어느새 새로운 나를 채워주는 그릇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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