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면서 수많은 것들을 본다. 사람과 사물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만들어 내는 장면까지. 전부 다 기억하기도 어려운 걸 매일 스치듯 마주한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동자만 굴려도 자유롭게 모든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빛이 주는 가장 커다란 이점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이 말에 깊게 동의했다.
얼마 전, TV에서 태양이 뜨지 않는 극야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었다. 수개월간 지속되는 빛의 부재에서도 사람들은 살았다. 24시간 어둠이 내려앉은 곳이라도 또 다른 일상을 꾸려 삶을 이어 나갔다. 위도 66.5°가 넘는 남극과 북극권 지역에 정착한 이들은 환경에 맞게 하루의 리듬을 조절했다. 이웃과 촘촘한 관계를 유지하고 비타민 D를 보충하는 등 해가 없는 세계에서 그들만의 질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어쩌다 그런 곳에 살게 되었냐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건 어떠냐고, 화면에 대고 무지한 질문을 쏟았다. 그런데 의외로 편안해 보이는 주민들의 표정에서 내가 정의한 어둠은 무엇인가 다시금 돌이켜 봤다. 어둠은 곧 무(無)를 의미한다고 여겨왔던 건 아닌지.
사실 어둠은 인간을 무감각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는 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암흑 속에서는 내 몸의 세포가 전부 깨어난다. 누가 흔들어 일어나라고 압박하지 않아도 조용히 제 자리를 찾는다. 처음 겪는 생소한 상황에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잠깐이다. 먼저는 청각이 서서히 열리는 느낌이 들면서 주변의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린다. 그다음엔 살결을 스치는 공기의 질감마저 느껴지고, 종일 누워있던 침대에서도 새삼스레 야릇한 체취를 맡을 수 있다. 혀끝에서 솟아나는 말간 침에도 미세한 맛이 있다는 걸. 이 세상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요즘엔 완전한 암흑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경우도 흔하다. 그곳에서는 시야가 차단되어 오로지 목소리, 말투, 호흡만으로 상대를 분간하고 그에게 온전하게 집중된다. 눈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색다른 감각으로 사물을 느껴보겠다는 호기심 또는 욕망이 많은 이에게 있는 것이다. 누군가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도 비슷한 이유지 않은가. 입술이 접촉됨과 동시에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면 두 배로 짜릿할 것 같지만,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눈을 감는다. 시각의 불을 꺼야만 된 맞닿은 입술 사이로 전해지는 촉촉하고 말랑한 감촉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요리 경연대회에서도 심사자들의 눈을 가리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암막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음식을 먹으면 진정으로 ‘음미’를 하게 된다. 누가 만든 건지 알 수 없게 되어 요리사의 이력에 국한되는 평가도 피할 수 있다.
우주를 그림으로 그리면 거의 전체 영역을 새까맣게 칠한다. 그 정도로 우주는 미지의 영역이다. 천체를 분석하는 과학자들을 통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무려 95%나 된다. 물론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 모르는지도 알지 못하니까. 이처럼 빛이 닿지 않는 영역은 여전히 더 넓고 무궁무진하다. 끝이 없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우주에 비유하곤 한다. 광활한 그 공간에서 우리는 빛이 허락한 것,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사물. 가만히 앉아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응시해 본다. 그 대상을 머릿속으로 다시 그려보며 깊게 새긴다. 어떤 사유가 떠올라 가슴에 와닿으면 나만의 방식대로 글을 써서 표현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면 이전보다 조금 더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지금도 무언가를 본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