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음을 충전

by 빛나는

이제껏 살면서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좋겠다.’였다. 양가 첫째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점을 부러워했고, 그래서인지 밝아 보인다고 말했다. 나를 조건 없이 응원해 주는 부모님과 가까운 친척들이 많은 환경은 분명 행복한 삶의 바탕이 되기에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때로는 이런 친밀함이 버거운 적도 있었다.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엄마가 할머니 전화를 받았다. 내 눈치를 보며 슬며시 안방으로 들어가는 걸 힐끗 쳐다봤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엄마가 쩔쩔매는 것처럼 보였다. 큰 딸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합격을 못 한 거라며 잔소리를 듣는 중 인가. 괜한 추측에 사로잡히자, 속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가 들끓었다. 엄마가 방에서 전화를 끊고 나오자마자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이 집안에서 태어난 게 진짜 싫다고 목 놓아 울면서 외쳤다. 입시에 실패하고 움츠러든 감정까지 더해 모두 쏟아부었다. 장녀로서 가족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나에 대한 실망감과 누구도 내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러움이 뒤엉켰다.


예민한 시기에 심긴 뒤틀린 감정은 스물한 살에 아빠가 세상을 떠나면서 깊숙한 곳에 묻혔다. 힘든 일을 겪었어도 계속 밝은 딸이 되고 싶었고, 주위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그 감정은 점점 잊어버렸고, 오히려 더 활발한 성향이 되었다. 지인들은 나를 유쾌한 사람이라고 기억하며 함께 있는 걸 즐거워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익살꾼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조용히 앉아 있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나로 인해서 모임이 화기애애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가끔은 오래전 감춰둔 감정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그런 날에는 ‘너와 있으면 재밌다.’라는 말조차 계속 웃겨달라는 은근한 요구처럼 들렸다. 항상 명랑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건가. 스스로를 다그치며 옅을 빛을 내는 경우도 많은데. 혼자서 바닥까지 내려가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내 성격을 배경에 의해 거저 얻은 양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뭘 알기나 하냐고 따지고 싶기도 했다. 숨어있던 인정 욕구가 그 정도 칭찬으로는 부족하니 더 큰 박수를 쳐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더 울적했다. 열댓 명 모인 공간에서 정적을 참지 못하고, 떠드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진 뒤에는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처음엔 전부 반짝이는 눈으로 내 입을 바라봤다. 점점 건조해지는 반응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고, 서서히 얼굴이 굳어졌다. 마침, 갑자기 일이 생겨 집에 가야 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나도 재빨리 가방을 챙겨 시답잖은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갈 길 가느라 바쁜 사람들 틈에서 하염없이 땅만 보고 걸었다. 멋 부리려고 신고 온 가죽 부츠에 뒤꿈치가 닿아 걸리적거렸다. 연한 살에 물컹한 기척이 느껴졌지만,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질 않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며 화려한 불빛이 퍼지는 거리에서 나만 우중충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고, 별 관심도 없는 듯했다.


가만히 걷기만 해서는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서점 간판이 눈에 띄었고,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에 놓인 책 중에서 한 권을 골라서 제목도 보지 않고 아무 데나 펼쳤다. 검은 글씨를 담은 얇은 종이가 계속 허공에서 펄럭였다. 그러다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숱하게 보고 듣는 뻔한 말이었는데, 그 한 줄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이 있어서, 참 고맙습니다.’


기대에 지쳐버려서 도망치고 싶다는 나에게, 얼굴도 모르는 작가가 해준 한마디였다. 분위기를 잘 띄워서, 누군가를 재밌게 해 줘서도 아닌, 나의 존재만으로 감사하다는 말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이런 문장에 감동을 받다니. 나는 위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늘 해맑게 남을 챙겨줘야 했으니까. 사실 오늘 나를 어둡게 만든 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웃었고, 물으면 대답했을 뿐이었다. 문제는 내 마음에 있었다. 늘 환해야 한다는, 모두가 그걸 원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내 감정을 눌러놨다. 그러고는 왜 몰라주냐며 서운해했다.


한동안 책에 붙잡혀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조금 전까지 같은 모임에 있던 친구가 보낸 문자였다. 네 덕분에 너무 즐거웠다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냐고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괜찮다는 답장을 하려다, 솔직히 기분이 조금 안 좋았다고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보냈다. 순간 답답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며 속이 시원해졌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동안 참아왔다니. 손에 쥔 책을 계산대로 들고 가는데, 그제야 발 뒤쪽에 쓰라린 감각이 전해졌다. 입 밖으로 민망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까지 쳤던 하루가 머릿속에 스쳤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어둑했다. 주변을 감싸는 반짝이는 네온사인의 빛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가족들이 나에게 보내준 건 부담보다는 사랑과 관심에 가까웠다. 내가 짊어졌다고 생각한 기대는 어쩌면 스스로가 만들어 낸 무게인지도 모르겠다. 든든한 장녀의 역할을 바라기보단 그저 잘 지내길 바라는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을 테다. 친구들도 내 활기찬 모습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위로가 되는 글귀를 보내 주면서 힘들면 연락하라고 조심스레 말하기도 했다. 나는 밝은 성격을 스스로 만들어 낸 거라 여겼지만, 실은 곁에서 빛을 더해 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내 안에 빛나는 순간들이 채워지고 있다는 걸. 이제는 느슨한 마음으로 그 찰나를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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