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한 알

by 빛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이라는 네 글자는 나에겐 문학의 수많은 소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순간적으로 가슴이 끓어올랐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일본에 대항하는 주인공의 일대기를 읽으면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작품을 감상한 것만으로도 애국지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멋있는 대사나 문장을 큰 소리로 따라 해 보며 혼자 히죽거리기도 했다.


서대문구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기에 독립문 아래를 닳도록 다녔음에도 그 문이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인 줄 알았다. 살았던 동네 근처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에도 자주 오갔지만, 드라마에서 출소 장면을 촬영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기웃거리는 장소 정도로 여겼다. 나이를 먹고 뒤늦게 한국사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야 독립문이 청나라의 간섭을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았고,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며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심심한 묵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자주 먹던 오렌지가 지니고 있는 무거운 의미에 대해서도 알았다.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땁시다."

애국 계몽이라는 뜻을 품고 머나먼 땅 미국으로 향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 부푼 발걸음을 내딛고 마주한 것은 신학문에 대한 환희가 아니라 조국의 운명과도 같은 동포들의 비참한 현실이었다. 선생은 꿈꿔온 학업도 뒤로 하고 한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사람들에게 오렌지 농장의 일자리를 알선해 주며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들이 내리쬐는 해를 온몸으로 견디며 수확한 오렌지는 독립투사의 자금줄로 바뀌었고, 이는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학창 시절에 한 번쯤 은 들어봤을 법한 안창호 선생과 오렌지 일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라며 가볍게 들었던 과거와는 달리 묵직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오렌지를 따던 한인들에게 더 집중되었다. 서러운 타국 생활을 하는 중에 믿을 만한 동료의 말에 감명하여 무더위에 혹사당하면서도 열심을 다해 일했던 사람들. 뼈 빠지게 일한 돈 17달러를 나라를 위해 내어 주던 마음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어떤 날은 이일 만이 우리가 애국할 수 있는 길이라며 열정이 차오르기도 했다가 또 어떤 날은 햇볕에 그을려 쓰라린 어깨를 매만지며 더는 못하겠다고 울부짖기도 하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조국의 미래와 알지 못하는 손에 전해지는 나의 피땀을 의심한 적은 없었을까? 그들은 눈물을 삼키며 오늘날의 내 모습을 무척이나 갈망했을 것이다. 어엿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거리낌 없이 한국어를 읽고, 듣고, 쓰고, 말하는 나를.


서른이 넘은 나이에 갑자기 한국사를 공부하겠다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내 나라 역사에 무지한 창피함에 시작한 일이었다. 막상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들썩이는 내 엉덩이를 강제로 묶어두기에는 시험이라는 도구가 가장 효과적이었으므로 한국사 능력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가장 유명한 선생님의 온라인 강의를 등록하고 문제집과 4색 볼펜을 구매한 뒤 공부에 돌입했다. 암기할 것이 많았지만 열심히 필기하며 열정적으로 임했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예상외로 일제강점기였다. 항일운동을 펼쳤던 단체들이 생각보다 너무나도 많았고 이름도 모두 비슷비슷해서 외우기 힘들었다. 왜 이렇게 헷갈리게 단체명을 지었는지, 왜 이렇게 활동을 산발적으로 했는지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마음을 꿰뚫었는지 영상 속 강의자가 말했다. 만약 이 부분이 얇다면 그것은 비겁한 역사이며, 수많은 단체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의 근현대사가 살아있는 것이라고. 영상 속 칠판은 다음 단원으로 넘어갔지만 나의 시선은 교재 속에 빼곡히 적힌 독립운동가들에게 머물렀다. 이후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지식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채워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시험지에 자주 보이는 알려진 사람들 외에도 역사에 미처 한 점의 자국도 남기지 못한 아무개들에 대해서. 그리고 물었다. 그들이 당신을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걸었는데 왜 본 체도 하지 않았냐고. 우리가 닦아놓은 당신의 시대를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냐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를 시작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인들에게 분야에 상관없이 자기계발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고, 이만큼 알고 있다고 우쭐대고 싶었던 것 같다. 배운다고 말하면서도 역사를 창문으로 여기며 무심히 관망하기만 했고,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나 결연한 의지는 완전히 빠져 있었다. 오만한 마음에 사건을 외우고 답을 맞혀보는 단순한 일에만 매달렸다. 몇 달의 노력 끝에 1급 자격증을 손에 쥐었지만, 내가 얻은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의미 없이 보낸 오늘도 다 역사로 기록된다. 아무개라는 흔적이라도 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호기롭게 나라를 위한 집회에 참석하는 일도, 거창하게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말도 쉽게 할 수 없다.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두려움이 많은 소인배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커다란 질문 앞에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단단한 과육을 만들어내는 오렌지. 따가운 뙤약볕에서 오렌지를 따던 이름 모를 사람들의 노고를 먹고 살아가는 나는 한없이 죄송하다. 1년에 한 송이도 사 먹지 않는 포도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렌지는 한 달에 열댓 개는 먹으니 그중 한 번이라도 그들을 기억하며 겸손해질 수 있으리라. 이것이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오늘이 영어로 선물(Present)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뻔한 의미 부여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그 깊은 뜻을 깨달았다. 오렌지 한 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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