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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이루리 glory Aug 24. 2024

내가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


남에게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말자.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타인의 마음을 얻는다고 나의 가치가 올라가지는 않는다. 나의 가치는 오직 나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이해해 주는 단 몇 사람만 있어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 그리고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조금이라도 더 칭찬받고 싶어서 착한 척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나도 빈혈이 심해 아프고 어지러운데 체육시간에 힘들어하는 친구를 돕기도 했고 대학 때는 마음에도 없는 고아원 봉사활동을 했다. 그때마다 주위에서 '착하다' 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듣기 좋았다. 그 말을 들으면 내가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지시를 따르면서 원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외부 요인에 의해 감정을 통제받고 행동하는 경우 '타인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약해진 사람은 삶의 방향키를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쥐어주는 셈이 된다. 모임에서 신나게 얘기를 하고 있을 때는 외롭지 않고 재미도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조용히 혼자 있으면 남들보다 못한 나의 상황을 생각하거나 상대방의 행동이나 발언이 상처가 되어 아프게 가슴을 후벼오는 경우도 있다.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남들이 봤을 때, 훌륭하게 잘 자라주길' 바랬던 것이다. 내 시선으로만 보면  너무 귀하고 예쁜 아이들인데 남의 자식들보다 못한 것 같아서 불안하고, 남들보다 잘 안될까 봐 두려워서 수시로 다그치면서 힘들게 했던 것 같다. 부모들이 "다 너를 위해서야. 지금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고 해 보자. 놀고 싶은 것은 그때 가서 하면 되잖아." 하면서 아이를 통제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길 바라는 경우가 많은데, 나도 이 말을 큰 애한테 자주 했다. 오은영 박사는 이런 부모의 태도를 '다정한 강요'라고 했다. 이런 훈육으로 아이가 거역할 수 없게 만들면서 부모의 뒤에 숨어서 사는,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게 된다.


 사회에서는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은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 이라는 질타를 받을 수 도 있다. 자유란 삶을 살아가는데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상태이지 무책임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어야 타인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단단하게 지키면서 자신의 삶의 꾸려나갈 수 있다. 부모라서, 남편이라서, 상사라서 내 삶을 통제하려고 할 때 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강하게 의견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모든 국면에서 주체적인 태도와 행동을 취해야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타인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에 대해 먼저 고민해 보았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 주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길 바란다. 상대의 진심을 읽을 수 있고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인간관계는 쉽지 않다.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오랜 대화와 시간과 서로를 알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 관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귀찮거나 짜증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제일 어려운 것은 누가 나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가려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잘해주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해 줄 무엇이 있지 않을까 고민도 했었다. 나의 자율 의지로 나한테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까?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돌아보면서 관계의 옥석을 가리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일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지만 5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고, 망연자실하게 있던 나를 위로하기 위해 태안까지 한달음에 달려와준 내 지인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나는 내 평생 잊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언니들에 비하면 조문객 방문 숫자로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버스를 타고 처음 오는 먼 길을 찾아와 같이 큰소리로 울어준 ○○언니, 그 와중에 아이 용돈까지 손에 쥐어주던 ○○언니, 우리 사총사 가족들, 늦은 시간 남편과 같이 와 준 ○○언니, 교회 지인들 다 너무 감사하다.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진심으로 위로하고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 힘든 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아름다운 관계는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완벽한 타인들이 만나서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소 부족하더라도 인정해 주고 더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길 바란다. 오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잉의 관계'보다는 '소수의 관계'가 필요하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따져 묻지 않고 서로의 눈을 바라면서 어떤 부분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내 인생의 보석과도 같은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인간관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매 순간의 결정으로 달라진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를 새롭게 정의 내려야 한다. 인간관계는 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함께 있는 상황이며 그와 함께 풍요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정, 사랑, 혹은 또 다른 관계의 영원함을 믿는다고 한들 어느 한쪽이 죽거나, 상대가 관계를 이어가기를 거부하는 순간 관계는 끝이 난다.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심란한 이유가 없다. 지금 이 순간이 풍요로우면 그걸로 괜찮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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