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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숲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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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Mar 24. 2023

라벤더의 끌림 (+22day)

엄마가 있는 당신의 공간이 부럽습니다.

길을 헤매며 둘러 둘러 가서 만나게 되니 인연인 거다.




흐리기만 한 하늘을 보고 내려왔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꺼내 쓰고 지도 검색을 하며 걷노라니 우산을 쓰고 있는 건 나밖에 없다. 동네 주민들은 모두 그냥 다닌다. '이 정도 가랑비는 신경 쓸게 아닌 건가?' 우산을 접고 동네사람처럼 그냥 걸어본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가 낯설지만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평소의 동네마실 반경보다 조금 멀리 떨어진 카페의 위치를 확인하며 '이 정도는 중간중간 확인만 하면 찾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휴대폰을 당당히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조금씩 낯선 길들이 보인다. '한결같이 유채꽃은 이쁘구나!' 하며 스쳐가는데 넓은 유채꽃밭 가운데에 무덤이 있다. 뭔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생뚱맞기도 한 풍경에 '이곳에 잠들어 계신 분은 행복하실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하며 휴대폰을 꺼내어 지도를 살펴보니 길을 한참 벗어났다. 다시 카페를 찾으며 낯선 동네를 자연스럽게 한 바퀴 하다 보니 여행객 하나 보이지 않는 한적한 이웃동네를 본의 아니게 둘러둘러 구경을 하게 된다.


길을 다잡아 가는데, 창문 사이로 곱게 수놓아진 자수작품과 뜨개질 소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손바느질 소품을 좋아하는 나에게 뜻밖의 반가움이라 "구경 좀 해도 될까요?"말을 건네며 들어간다. 작은 가게 안을 둘러보는 내게 "그냥 보면 뭐가 없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이것저것 많아요. 천천히 구경하세요."라는 친근한 인사. 한 땀 한 땀의 정성이 느껴지는 자수에 시선을 두"자수는 엄마가 직접 수놓으신 거예요. 뜨개질은 제가 한 거구요."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작업 공간처럼 보이는 곳에서 자수를 놓고 계시던 어머님께서 인사를 건네주신다.


내 나이로 보이는 딸은 뜨개질을, 엄마는 자수를 놓으며 소소한 일상을 함께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리움과 따뜻함에 마음이 무장해제된다. 라벤더가 수놓아진 수건과 티코스터 2개에 손이 간다. 뭐든지 마음에 들면 똑같은 것을 2개 사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1개씩만 구매를 했었는데, 오늘은 티코스터 2개가 사고 싶다. 그런 마음인 거다.


이곳을 발견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며 '이곳을 만날 운명이었다.'며 즐겁게 웃어 보인다. 여행지 와서 이렇게 정답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나 싶게 대화를 나눈다. 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주는 환한 미소의 딸의 모습이 부럽다. '나도 엄마랑 있을 때 저렇게 따뜻했는데' 싶다.


낯선 길에서는 어김없이 빛을 발하는 길치, 방향치 덕분에 따뜻해진 선물꾸러미를 들고, 무려 1시간 만에 목적지인 카페에 도착해서 문을 여니 궂은 날씨 탓에 손님은 나뿐이다. 토피 루이보스와 바닐라약과쿠키를 주문하고 창가 쪽 바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진동벨이 아닌 직접 테이블로 세팅을 해주는 손길이 고맙다.


비 오는 날, 창문을 통해 작은 정원에 떨어지는 비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눈이 감긴다. 카페에서 눈을 감고 멈춰있기는 처음이다. 루이보스의 향긋한 온기가 코끝을 치고 빗소리와 어울리는 감미로운 선곡도 안성맞춤이다. '좋다' 다른 표현은 없다.


편안하게 멍도 하면서 책을 읽다 보니 나처럼 혼자서 들어오는 손님들이 있다. 각자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혼자인 손님들만 있으니 여럿이지만 혼자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참을 책 속에 빠져 있는데 단체손님 소리가 들린다. 이제 일어날 시간인 거다.


방향을 잘 보고 돌아오는 길은 정말 짧다. 매번 버스를 타던 정류장의 길 건너편이 이웃동네였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가까운 거리인데. 내가 뭘 한 거지?' 하면서도 '길을 헤맨 덕분에 자수가게를 발견했으니 가치가 있었다.' 한다.


숙소로 돌아와 조금 분주하게 정리를 마치고 포트에 물을 올린다. 오늘 구매한 자수 수건을 테이블보로 깔고 티코스터에 찻잔을 살며시 놓는다. 선곡은 호텔델루나 OST 피아노 연주곡이다. 화면에 이쁘게 나올 수 있도록 평소보다 홍차를 좀 더 진하게 우려 잔에 붓고는 사진을 찍어본다. 유일한 찻자리 친구였던 엄마가 보셨으면 '또 소꿉놀이 한다.'라며 웃으셨을 테지.




길을 헤매다 옷이 다 젖어도 따뜻했던 하루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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