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일찍 일어나면 우도, 늦게 일어나면 성산일출봉을 가기로 하고 누웠는데 후배로부터 쿠폰 하나가 날아왔다.'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는데, 한번 먹어보는 거어떠세요?'라는 권유와 함께 '보낸 음료쿠폰으로 다른 음료도 주문됩니다.'라는 자세한 설명들도 덧붙인 장문의 문자를 보니 참 그녀답다.
가까운 매장을 검색하니 성산 앞에 딱 있다. 그리하여 오늘 목적지는 그냥 성산이다. 제주까망라떼를 마시며 성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상보다 꽤 높아 보인다. 간만에 달달하게 에너지도 충전했으니유료코스부터 시작해서 무료코스까지 모두 보고 오겠노라 야무지게 마음먹고 출발한다.
돌계단, 데크계단 밖에 없다. 힘들다는 생각보다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 같다. 중간에 쉴 수 있는 돌의자를 봐도 스쳐서 계속 오른다. 중간중간 잠시 서서 '경치 좋구나!'한번 생각하고 쉼 없이 계속 올라 정상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 도착했네.' 한다.
다들 분주하게 사진을 찍고 나면 잠시 숨만 고르고 내려가는데, 어르신 한 분과 나만 정상 데크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한참 동안 분화구를 바라본다. 정말 웅장한 이 풍경을 나는 바라만 보고, 어르신은 어떤 생각을 하시며 바라보는지 모른다. 순간 '땡'하고 일어선다. 미련 없이 내려오며 '아는 만큼 보이는 건데, 아는게 없어서 안 보이는 건가'그렇다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 넘어간다.
해녀의 집으로 내려가는 해안절벽 아래에 검은 흙으로 된 넓은 해변이 보인다. 정상에 대한 실망이 있었던 터라 고민이 되긴 하지만 일단 내려간다. 모래를 피해 돌 위로 걷는데, 주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모래 위를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슬쩍 나도 모래 위를 걸어 보니 아주 신기한 흙이다. 작은 검은색 알갱이로 된 모래사장은 신발에도 손에도 전혀 묻지 않는다.
모래의 재미난 감촉을 느끼며 걷다가 해변 전체풍경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건 뭐지?'추운 겨울날 온돌방에 들어와 앉았을 때의 느낌이다. 따뜻한 모래의 온기가 엉덩이부터 발뒤꿈치까지 전해진다. 매트리스처럼 몸의 하중에 맞춰 자리 잡은 따뜻한 모래가 감동이다. 위는 차가운 바람이 스치고, 아래는 따뜻하니 노천탕에 있는 것처럼 노곤노곤 긴장이 풀린다.
60대로 보이는 부부가 조금 전의 나처럼 조심스레 돌만 밟으며 해변의 중간까지만 와서 멈춘채 구경만 한다. '모래 밟으셔도 됩니다.'라고 알려드리고 싶지만 거리감이 있다. 또한 과하다. 앉았을 때의 이 따뜻한 모래의 느낌도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즐긴다. 한 명쯤 따라서 앉아볼 만도 한데 없다.
사진 찍는 사람들, 돌 위에 눕거나 앉아서 경치를 보는 외국인들, 보트 타는 사람들 등 구경거리가 많다. 잠시 후 해녀의 노래 공연이 있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굳이 가까이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앉은자리에서 귀로만 감상하며 박수를 힘껏 친다.여긴 정말 일어나기 싫은 매력이다.검은색 절벽으로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해변에서 즐기는 신비로움은 블랙홀에 빠져든 후 투명인간이 되어 다른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기분이다.
숙소로 돌아와 검은 해변의 이름을 찾아보니 '우뭇개해안'이란다. 그리고 설명을 읽고 얼굴이 붉어진다. 무지함이 불러온 한낮의 감성이 부끄럽다. 우뭇개 일대는 4.3 항쟁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토벌대에 의해 목숨을 잃은 장소라는 설명이 있다. 그리고 1943년에는 일본군이 성산을 요새화하기 위해 성산일출봉 해안절벽에 24개의 굴을 파서 폭탄과 어뢰등을 감춰두고 일전에 대비했지만 사용하지 못하고 패전했다는 설명도 있다.
'미리 검색이라도 하던지, 안내글이라도 열심히 읽던지' 뭐든 건성건성으로 지나친 내 모습을 되돌아보며, '제주 곳곳에 우리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귀담아듣지 않은 나의 우매함에 마음이 불편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