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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숲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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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Mar 29. 2023

나의 숲(+27day)

빨간 벽돌은 어디에?

숲에 끝까지 남 것도 숲의 모든 순간을 아는 것도 숲 밖에 없다.




비자림 가는 길, 한낮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버스정류장에 앉아있으니 눈부시게 좋은 날이다. 도로 맞은편 타이어센터 앞에 빨간 열매 가득한 가로수가 보인다.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초록 잎과 새빨간 열매의 선명함이 뒷 배경으로 인해 아쉽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좋아하는 카페 앞에도 같은 가로수가 있다. 빨간 벽돌 건물과 그림처럼 어울려 예쁘다. 도로 하나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가로수 뒤의 배경이 뭐냐에 따라 존재의 가치가 달라 보인다. 그냥 같은 나무일뿐인데.

 

비 오는 날 이후 다시 찾은 맑은 날의 비자림은 변함없이 충만한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누군가에게는 비 오는 날의 비자림이, 누군가에게는 맑은 날의 비자림이 최고라지만 숲은 굳건히 있는 그대비자림이다. tea클래스에서 '햇살 좋은 날 차밭이 예쁘다고 해서 햇살 좋은 날 맞춰서 왔는데, 팽주님은 어떤 날의 차밭이 가장 좋은가요?'라는 질문에 '이런 날은 이래서 저런 날은 저래서 모든 날 차밭은 다 좋습니다'라던 팽주의 말처럼 애정하면 흐리든 맑든 모든 순간이 좋은 게 맞다.


오늘의 숲에서는 새로 돋아난 연한 연둣빛의 잎들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새로 돋아 잎, 보이지 않던 식물 등 매번 올 때마다 새로운 모습이 보이고, 더 잘 보이는 것도 찾아도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곳을 봐도 새롭다.


오솔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한 번 왔다 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나처럼 좋은 날, 흐린 날,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번 오기도 한다. 천천히 걷거나 쉬었다 가기도 하고, 빨리 힘차게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 오든 여러 번 오든, 금 스쳐 지나가든 오래 머물다 가, 오솔길이 끝나면 재각각 자신의 갈 길 간다.


숲에 나 있는 오솔길은 방문객이 편안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마련된 유일한 길이다. 누군가는 소란스럽게 지나가기도 하고 조용히 지나가기도 한다. 누군가는 함께 온 일행끼리 대화하기 바빠서 숲은 건성으로 보며 지나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천천히 숲을 충분히 즐기고 살피며 지나가기도 한다.


어떤 구간을 지날 때면 새들이 요란스럽게 지저귀기도 하는데, 내 영역에서 나가라는 듯 날카롭게 들리는 지저귐에 놀라기도 하고, 발걸음이 빨라지기도, 아랑곳없이 가기도, 미안함에 조심히 걷기도 한다. 숲의 소리에 어떻게 반응을 하든 지나가는  같다.  


숲과의 추억을 위해 연신 사진을 찍는다. 자신이 중심이 되게 찍느라 흐리게 처리된 숲은 어딘지 알 수 없게 찍히기도 하고, 숲만 여기저기 찍으며 자신은 없기도 하고, 나와 숲이 어울리게 찍느라 애쓰며 찍기도 한다. 이렇게 찍으나 저렇게 찍으나 그 순간의 숲이 오롯이 담기지는 못한다.


어떤 이는 궂은날 와서 숲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다시 찾지 않을 수도 있고, 너무 좋은 날 와서 숲에 대한 과한 이미지로 다시 찾을 땐 실망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숲이 좋아 수시로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을 오든, 수없이 오든, 숲의 모든 순간 함께 하지 못하는 건 같다.


간혹, 오솔 아닌 곳으로 굳이 발을 내딛는 경우도 있다. 한 번 발자국이 찍히면 다른 사람들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없던 길이 생기고 길이 된 곳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공간으로 바뀐다. 하지만 길이 아님을 명시하선을 긋기 시작하면 점점 회복되어 길은 사라지고 숲 속으로 스며든다. 누군가에게는 가보지 않은 숲을 살펴보는 재미가 되기도, 길을 잃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숲의 입장에서는 그냥 침범이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숲을 생각하며 걷다 보니 숲이 '' 같고 내가 '' 같다. 숲에 끝까지 남 것도 숲의 모든 순간을 아는 것도 숲 밖에 없다. 지금의 나와 똑같은 나는 없다. 변하고 변형되기도, 새로 생기고 없어지기도, 발견되기도 잊히기도 하면서 매 순간의 나는 다르다. 타인은 결국 순간의 나를 지나갈 뿐이다. 내 삶에 끝까지 남겨지는 것도 내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는 것도 나 밖에 없다.


굳이 깔끔하게 가지를 치고, 잡초도 뽑고, 예쁜 꽃들로 채워 각 식물의 특징에 맞게 물을 주고 영양제도 주면서 인위적 정원으로 가꾸지 않아도 숲은 존재로 충만하다. 타인에게 나를 보일 땐 그들의 취향에 맞게 또는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일부 가꿔진 정원을 보여 줄 수 밖에 없지만, 나에게 만큼은 숲의 모습 그대로 변화하는 나를 만나고 발견하며 모든 순간의 나다움 자체로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 애정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완전히 놓아버린 숲은 밀림이 되어 아무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숲이 건강하게 잘 숨 쉴 수 있도록 애정하면서, 때로 누군가는 편안하게 오솔길 따라 각자의 모습대로 지나갈 수 있도록 기꺼이 길 하나 내어 줄 수 있는 포용력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떠다니는 생각을 흘려보내고 있는데, 옆에서 빠른 걸음으로 '풀이랑 나무 밖에 없는데 이런 곳을 왜 왔는데?' 하며 옆친구에게 화를 내며 지나간다. '누군가에게는 이 숲이 화를 돋우는 숲이 될 수도 있구나' 하며 나의 사색이 멋쩍어진다.


돌아오는 길, 정류장 주변 빨간 열매 가로수를 다시 본다. 같은 가로수다. 그럼에도 여전히 빨간 벽돌 건물 앞 가로수가 유난히 선명하고 예뻐 보인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던가.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나답게 살면 된다'라는 멋진 결론으로 이어져야  이 시점에 내가 가장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곳에서 숨을 쉬며 숲을 가꿔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나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위치에 뿌리내렸으니 도리가 없지만, 나는 내 의지로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곳에 그래서 가장 선명하게 빛날 수 있는 곳에 나를 두고 싶다. 낯선 곳일 수도 익숙한 곳일 수도 ''이 아닌 ''일 수도 있는 나만의 빨간 벽돌을 찾고 싶어졌다.




생각을 흐르는 대로 두니 난감한 결론으로 가는 하루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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