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증

퇴사의 정당성

by 하루사리

'아니요. 전 제 일 사랑하거든요.'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 모습이 부러워서.




일주일 만에 싱가포르에서 구매해 온 tea포장지를 뜯어본다. 집에 오면 차시음을 제일 먼저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뭔가 어수선한 마음에 제대로 차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취향의 새로운 싱글티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 편안하게 즐기기에 좋을 것 같은 밀키우롱을 구매해서 왔는데, 포장지를 뜯는 순간 확 퍼지는 향이 밀키우롱이 아니다. 분명히 싱글티로 확인하고 샀는데 가향차가 틀림없다. 다시 포장지를 살펴본다. 이런! 밀키우롱 글씨 옆에 괄호 peach가 적혀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버릇이 여기서 또 한몫을 한다.


좌식으로 평온하게 앉아서 개완에 우려 마실 생각으로 세팅을 미리 해두고, 마지막 건엽 계량을 하던 타이밍에서 멈춰 선다. 가향차를 개완으로 우려 마시기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식탁으로 눈길을 돌린다. 언제든 간편하게 차를 즐기려고 서양식으로 세팅을 해 둔 다구들이 있다. 작년 말 모임에서 소소하게 자신을 위한 선물을 각자 사자며 곗돈 10만 원씩을 용돈으로 받았고, 이 용돈으로 1년을 잘 보낸 스스로에게 준 선물이다. 가향차의 향미와 다구들의 빛깔이 딱이다.


가벼운 재즈풍의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신다. peach향이 본질인 밀키우롱의 향미를 완전히 덮어버린 차를 마신다. 이 차를 어떻게 마셔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고민하지 않고 마시면 되는 차구나' 한다.


어찌 보면 차 자체의 향미를 위해 강박처럼 다점을 최소화하며 마시던 싱글티와는 다르게 딱! 지금처럼 편안하게 다점과 함께 마시기에는 더없이 부담 없는 차, 향긋한 복숭아향이지만 달지 않고 깔끔해서 페어링 차로서 훌륭하다.


그냥 향긋한 차를 여유롭게 즐기는데, 눈이 까스럽다. 테이블에 꽃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씩 배송되는 꽃다발로 인해 화병에 꽃이 한아름 꽂혀있고 버젓이 눈에도 잘 보이는데, 지금 즐기고 있는 찻자리에 어울리는 화병에 꽂혀 있어야 할 것 같다. 한 번 눈에 거슬리면 기필코 해야 하는 강박증이 뜬금없이 오늘은 이거다.


차를 마시다 말고 작은 화병을 가져와 큰 화병에서 아이보리빛 국화 한 송이를 꺼내어 적당히 꽂고 찻자리에 놓는다. 다시 만족스럽게 차를 마시는 것도 잠시 작은 화병이 거슬린다. 더 낮고 작은 화병을 가져와서 꽃을 옮기고, 또 더 낮은 작은 화병을 가져와서 꽃을 옮기는 것을 반복하고 나서야 까스러움이 사라진다. 꽃병과 꽃의 비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게 차를 마신다. 더 이상의 방해 없이.


밑도 끝도 없는 강박증도 직업병이다. 뭔가 눈과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즉시 해결해야 한다. 뭔가 찝찝하고 거슬렸던 상황들을 그냥 넘기고 나면 어김없이 뒷북처럼 문제가 되어 기필코 해결되어져야 하는 사건들이 되었기에 본업에서는 최대한 직면해서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 본능처럼 자리 잡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강박증은 본업에 원치 않는 천직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이 강박증이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 묘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매일 습관처럼 이부자리를 정리하다가도 어느 날은 이불이 침대시트에 흘러내리는 각도와 길이에 꽂히기도 하고, 설거지 후 건조해 둔 그릇들의 배열상태에 꽂히기도 하고, 디퓨저스틱의 교차지점이나 방향에 꽂히기도 하는 등 강박증이 이상한 습성으로 변질되어 내 일상에 파고들었다. 한 번 거슬리면 그것을 원하는 대로 해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찝찝함에 끝내 출근하다가도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원하는 형태로 맞춰놓고 다시 나가는 상황이 생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타인의 영역에서 발현되는 것도 아니고, 바쁠 때는 밑도 끝도 없는 증상은 신경 쓸 겨를이 없기에 본업에서도 일상에서도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문득 병인가 싶기도, 고쳐야 하나 싶기도. 그러려면 본업을 그만둬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섬광 같은 확신으로 퇴직의 합리화에 한 표를 던져본다.


'로또 1등에 걸리면 일 그만 두실 건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요. 전 제 일 사랑하거든요'라고 대답하던 my artist의 당당함 앞에 연금복권을 매주 구매하며 당첨을 간절히 바라는 팬이라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연금복권 1등에 걸리면 어떻게 할 건가요?'라는 자문에 '내일 바로 사직서를 내야죠. 전 제 일 빨리 그만두고 후련해지고 싶거든요'라고 대답하는 내면의 당당함이 굳건하다. 이럴려고 찻자리에 앉은 건 아닐텐데, 부푼 기대에 설레며 즐거우니 되었다.




내일의 사직서를 당당히 내밀 연습을 매주 하는 희망 찬 하루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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