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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Feb 27. 2024

회색의 바다, 그 열기 속으로


눈앞에 펼쳐진 회색의 바다. 마치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보는 듯했다.


지난여름, 해가 뜨는 동쪽으로 발코니가 있는 통영의 한 호텔에서 '내일 아침 일출을 보면 좋겠다' 생각하고 잠들었는데 화들짝 일어나 보니 7시가 넘었다. 암막커튼을 젖히고 나서자 해는 벌써 떠올라 발코니의 타일을 데우고 있었다. 맨발로 나서려다 바닥이 너무 뜨거워 움찔한다. 슬리퍼를 찾아 발에 고 그 열기 속으로 들어갔다.



회색의 그러데이션 외에 일체 다른 색깔이 끼어들 틈 없는 흑백의 바다. 내 눈에서 색소를 감별할 수 있는 세포들이 마비가 된 것 같다. 아니혹시 간밤에 내가 죽어 삼도천에라도 온 겐가 싶기도. 난생처음 보는 낯선 풍경을 잠이 덜 깬 머리로 생각하다 아침 바다에 해무가 낀 것이구나 깨달았다. 


핸드폰을 들었다. 저녁형 인간인 내가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은 몇 년에 한  있을까 말까 한 일이기에. 아침 7시에 바다를 뒤덮은 안개, 태양의 손짓 한 번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세상에서 가장 연한 존재인 안개가 지배하는 풍경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기에.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다. 떠오른 해의 꼬리를 물고 은빛으로 빛나는 윤슬. 겹겹이 포개진 구름과 안개사이를 뚫고 나온 태양빛과 볕. 문명이란 없는 지구의 끝에 혼자 떨어진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데 바닷속 어디에선가 일터로 나가는 통통배 소리가 안심하라 한다. 너만 몰랐지 늘상 있었던 풍경이라고 날 깨운다.


회색 바다의 그 뜨거웠던 열기가 갑자기 그리워진다. 뼛속까지 시린 겨울의 한기 때문이다. 추위를 타지 않던 사람이 올해는 목덜미가 너무 추워 겨울 내내 캐시미어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동생은 거실에서 반팔을 입고 있는데 나는 목도리를 칭칭 동이고 있다. 혼자 있을 때도 사람 속에 있을 때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 한기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움은 가슴속에서 삭힐 때 찬란해지는 것이지만, 혹시 보고 싶은 사람의 꿈을 꾸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



지난여름, 그리움을 닮은 바다 안개 태양에게 조금씩  잠식되는 것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바싹 마른 북어가 바다를 그리워하듯, 나는 다시 한번 열기 속으로 들어가싶어졌다. 이 한기를 녹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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