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술과 음악과 여행의 공통점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사무치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쓴 여행기를 읽는 것은 좋아한다. 믿을만한 사람이 쓴 여행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제일 처음 접한 여행기는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여행기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 후 영화로도 봤던 것 같다. 어쨌든 그 책은 여행이라는 것을 다락방에서 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존재였다. 김영하도 그 책을 좋아한다고 <여행의 이유>에서 말한다.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여행의 이유> '추방과 멀미' 中
대부분의 작가들은 일상을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게 그들의 산문에서 여행이야기를 많이 한다. 김영하처럼 여행기를 써서 출간하는 작가들도 꽤 많다. 그렇지만 작가들의 여행이라는 것이 여행 정보를 주고받기보다는 그 작가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작가들의 그런 정신세계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하고 나면 그들의 문학이 훨씬 더 잘 읽힌다.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라 할지라도 그의 작품엔 그 작가의 성격이 담기기 마련이다. 김영하의 철학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문체는 이 여행기에서도 빛을 낸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여행의 이유>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中
김영하는 1년에 한 번 이상은 여행을 간다고 하는데, 처음 갔던 외국 여행의 에피소드를 비롯해 많은 여행지의 이야기를 한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몇 달 혹은 몇 년간 여행자 아닌 여행자가 되어 살기도 하고, 방송을 위해 갔던 여행(알쓸신잡) 이야기에 자신만의 여행철학을 덧붙이고, 그 여행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기도 한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여행에서 시작해 '삶과 글쓰기와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지고 종내는 자신의 삶이 곧 여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길게 휴가나 시간을 낼 수 없는 직업인지라 긴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다. 다행인지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곳들이 있다. 제주, 경주, 담양, 통영 등인데 이곳들은 도시와 전원의 중간 형태쯤 되는 곳들이다. 올해도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을 다녀왔다. 봄엔 제주, 여름엔 경주, 가을엔 담양. 대부분 2박 3일 정도지만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책 한 권 들고 가서 생각과 함께 머물다 돌아오는 여행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안도감 때문인지 익숙함이 좋아서인지 '내가 과연 그곳을 다녀왔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하리만치 여행지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사진이 남아 있어 다녀왔구나 싶지만, 풍경사진만 찍어 오는 통에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현실감은 없다. 그러나 김영하처럼 믿을 만한 사람의 여행기를 읽고 나면 오히려 여행지를 잘 보고 온 느낌이 든다. 작가 덕분에 사려의 여행을 한 셈이 되는 것이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도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 <여행의 이유> 中
김영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은 여행과 같다'라고 이야기한다. 인생은 부모로부터 왔을 때의 축복과 행복함에 비해 머무를 때의 고단함과 불안, 떠날 때의 아쉬움이 여행과 꼭 닮았다. 그렇게 오고, 머물다 간다.
지금 나는 여행 중이고,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낀다. 그리고 기록한다. 아직 떠날 때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닥 만족스럽진 않지만 현재 이 여행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