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의 뜻은, 하는 일 없이 세월만 헛되이 보냄이다. 김훈작가 스스로 단언한 '허송세월하다'를 말 그대로 허송세월로 믿는 이가 과연 있을까? 그의 허송세월은 무언가 잉태하고 있는 허송세월,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일시 멈춤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멈춤의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부지런히 생각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좇아 현상이 따라오거나 또는 생활을 좇아 생각이 따라왔을 것이다.
그의 책을 읽다 보니 강태공이 떠오른다. 강태공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낚시를 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늘 없이 줄만 던져놓고 있었다고 한다. 정작 물고기에는 마음이 없고, 그 시간 동안 명상에 잠겨있던 모습이 후에 그를 등용한 문왕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가 낚아 올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세월이고 인생이며, 삶의 이치였다.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新生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허송세월' 中
인용한 저 문장들은 심플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햇볕에 대한 단상이지만, 그의 생각을 한 번 거치고 나면 모두를 환기시킬 만한 명문장이 된다. 울림을 준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는 이 역설적인 한 문장이 이 책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그는 깊은 관찰과 사려를 통해 문장을 길어 올리는 강태공이었다.
김훈 작가는 아직도 원고지에 꾹꾹 눌러 글을 쓴다. 이 행위는 글을 쓰는 "내가 나의 글을 내 몸으로, 내 육체로 밀고 나간다는 확실한 느낌" 때문에 연필로 쓴다고 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있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광경이고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작가의 노동'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는 머리로 생각한 것을 손으로 수고롭게 써나가는 '노동'이라는 행위를 거쳐야 비로소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고 믿는 정직한 근로자인 것이다. 서걱서걱 연필로 원고지를 채우는 것과 노트북 흰색 화면의 커서를 움직여 갈 때의 기분은 다르다. 김훈작가에게 노트북으로 글을 써보니 어떻더냐는 질문은 아마 영원히 할 수 없을 것 같다.
1부의 '새를 기다리며'에서는 김훈의 현재시점을 들여다볼 수 있다. 병이 들어가는 노년의 삶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루틴대로 글을 써 나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2부에서는 '글과 밥'이라는 주제 아래 조금 더 일상의 모습으로 들어간다. 김훈에게 글을 쓰는 행위의 고달픔과 애정은 마치 샴쌍둥이처럼 어느 한쪽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인 듯 읽힌다. 그리고 "웃자라서 쭉정이 같고, 들떠서 허깨비 같은 말"을 버리고 정량의 언어만 사용해서 삶과 글을 밀착시킨다. 3부 '푸르른 날들'에서는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이들을 이야기한다. 정약용 형제부터 안중근, 박경리, 신경림 등 '푸르른 날들'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현재의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와서 닿는다.
<허송세월> 속의 45편 글들에 등장하는 사람과 사물은 '원래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이지만 김훈의 생각과 염려 속에 새로운 이미지를 획득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 너머의 철학까지도 이야기한다.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단순한 언어가 갖는 힘의 고귀함을 아는 작가가 바로 '김훈'이다.
주어와 술어를 논리적으로 말쑥하게 연결해 놓았다고 해서 문장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주어와 술어 사이의 거리는 불화로 긴장되어 있다. 이 아득한 거리가 보이면, 늙은 것이다. 이 사이를 삶의 전압으로 채워 넣지 않고 말을 징검다리 삼아 다른 말로 건너가려다가는 허당에 빠진다. 이 허당은 깊어서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허당에 자주 빠지는 자는 허당의 깊이를 모른다. 말은 고해를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가 휑하니 비면 문장은 들떠서 촐싹거리다가 징검다리와 함께 무너진다. 쭉정이들은 마땅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므로, 이 무너짐은 애석하지 않다. 말들아 잘 가라. - <허송세월> '말 년' 中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화려한 비유를 찾아 늘 수렁 속을 헤매는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문장이다. 군살이 붙은 문장을 부여잡고 쓸고 다듬었던 나는, 이 쭉정이들이 무너지는 것에 가슴 아팠다. 그런데 김훈은 잘 가라고 쿨하게 보낸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문장이 되지 못하는 쭉정이였다는 것이다. 내 속이 시원했다. 이제 나도 서랍 속에 쌓여 있는 쭉정이들을 떠나보낸다. 내 문장이 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쭉정이'였기 때문이었다. 김훈처럼 심플하게 사려가 내놓은 결과를 다시 쌓기로 한다.
매일 일산호수공원에서 햇볕을 쪼이는 노작가의 허송세월은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산책길에 종종 만나는, 공원에 앉아 볕바라기를 하는 백발의 철학자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