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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북세이 07화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 없는 사람

나목 / 박완서

by 마루


'나목'은 어디까지나 소설이지 전기나 실화가 아니다. '나목'을 소설로 쓰기 전에 고 박수근 화백에 대한 전기를 써 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내가 그를 알고 지낸 게 그나 내가 가장 불우했던 동란 중의 일 년 미만의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전기를 쓰기엔 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렇지만 한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 놓지 않으면 견디어 낼 수 없었던 1.4 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나목』'작가의 말' 中


가난한 농가의 정경과 서민들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을 소재로, 한국적 정감이 넘치는 회화 세계를 정립한 화가 박수근. 그래서 그를 '서민의 화가'라고 부른다. 고 박수근은 1965년의 유작전과 1970년의 유작전을 계기로 재평가되어 유화로서 가장 한국적인 독창성을 발휘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박완서 작가와 박수근 화백의 만남은 『나목 』뿐만 아니라 박완서의 다른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6.25 직후 미군부대에서 역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이야기로 등장한다. '작가의 말'에서 처럼 젊은 시절 박완서가 박수근이라는 예술가에게 인간적으로 끌렸던 것은 사실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타락하고 예민한 예술가가 아니라 아내와 자식을 키우기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가장으로서의 예술가는 흔치 않기에.


한국 전쟁 중 두 오빠를 잃은 주인공 '나(이경)'는 서울의 고가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미군 부대 안의 초상화 가게에서 일한다. 초상화 청탁을 받는 일을 하던 중 '옥희도'라는 화가를 만난다. 전쟁 후의 절망감과 외로움에 빠져있던 '나'는 옥희도의 황량한 분위기에 매력을 느낀다. 그는 유부남이었고 아이가 다섯이나 딸려있어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황태수와 도피성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결혼 생활은 그럭저럭 행복했지만 가슴 한 편의 구멍을 메울 수 없었던 '나'는 신문에서 옥희도의 유작전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무와 두 여인> 박수근
나는 좌우에 걸린 그림들을 제쳐 놓고 빨려 들듯이 곧장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소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달프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자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 『나목』中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유작전에서 '나'는 옥희도가 그린 '나목'을 보면서 그의 그림이 '고목'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과거 옥희도의 단칸방에서 보았던 그림은 생명력이 고갈된 죽음의 이미지였고 암울했던 '나'의 초상과도 같았다. 하지만 유작전에서 다시 본 그 그림은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는 생명력의 이미지였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예술혼을 불태우던 옥희도의 '꿈'이 그림 속에 있었고, 그런 옥희도는 '나'가 일상적 삶에 묻히기 전에 품었던 젊은 시절의 이상과 꿈이었다. 화랑을 나오며 '나'는 나무들이 좁히지 못하는 서로의 거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깨닫는다.


마흔에 <나목>으로 등단한 작가 박완서. 주부로서의 일과를 끝내고 부엌의 식탁에 앉아 소설을 썼을 것이다. 대단한 것은 <나목>을 쓰기 전까지 그녀는 습작도 하지 않았고, 소설을 쓰고 난 후 퇴고도 없이 장편 소설을 완성했다. 소설은 그것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 작품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작가가 그 작품에 몰입했던 시간만큼은 산고와 다를 바 없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기 위해 고통스러운 내면의 싸움을 하며 자신을 이겨낸 치열함의 산물인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모든 소설은 어느 작품 하나 위대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박완서의 소설은 그녀가 겪었던 격동의 시간들을 수많은 작품들로, 세월을 지나왔노라 증언한다.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래서 오히려 박완서는 완성형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첫 소설 『나목』은 이후 박완서의 작품들을 압축해 놓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그녀의 수많은 소설들이 탄생되었다. 『그해 겨울을 따뜻했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엄마의 말뚝』등을 잉태하고 있었던 소설이 바로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초심으로 돌아가자'라고 한다. 초심은 타성에 젖지 않은 순수성을 말한다. 본래의 모습, 평상심, 깨어 있음 등과 같은 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초심부터 완성형인 사람이 있다. 나목 같은 사람이다.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히 남아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옥희도의 '나목'처럼 봄을 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박완서작가는 어쩌면 자기 안을 채우기 위해 늦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박수근화백은 사후에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세간의 평가가 목적은 아니었을지언정, 그의 삶에 주름이 조금이나마 덜 잡혔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내하고 기다리고 자기만의 세계를 펼친다. 인정받기 위해 설익은 그림을 내놓지도 않았다. 박완서와 박수근에게 시간은 아무 의미 없었을 것이다. 우리 마음은 각오하는 순간 바뀔 수 있지만, 오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결심한 사람은 언제든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법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아니,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초심은 원래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찾으려 노력하면 오히려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박완서의 '나목'처럼 옥희도의 '나목'처럼 인내하고 관조하며 봄을 기다릴 일이다. 봄은 반드시 오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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