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 한강
10년 전의 이른 봄,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10년 전의 내가 짐작했던 것과는 퍽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이 연작소설이 출발한 것은 그곳에서였다.
- '작가의 말' 한강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제일 많이 한 질문은 '왜?'였다. 왜? 도대체 왜?
나는 『채식주의자』 를 2016년에 읽었다.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강 신드롬에 다시 읽으면서 「나무 불꽃」은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읽은 것 같은데 읽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면 읽었지만 영혜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창작과 비평』 1997년 봄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를 확장시킨 소설이다. 「내 여자의 열매」는 '아내'가 음식을 거부하고 베란다에서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내 식물이 되는 이야기다. 식물이 되어 말을 할 수 없는 '아내'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남편은 그녀를 화분에 옮겨 심는다.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나무는 결국 시들어버리고 마지막으로 열매를 남긴다. 남편은 아내가 남긴 열매를 화분에 심으며,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라고 생각한다.
문학에는 신빙성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장치가 있다. 어리석은 화자라고도 하는데, 상황을 잘 모르거나 나이가 어린 화자들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이다. 이 신빙성 없는 화자는 대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소설은 독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판단을 계속 뒤로 미루게 된다. 진실이 유보되는 셈인데, 『채식주의자』는 뒤로 가더라도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이 소설은 한강의 세계에서 한강만이 알아볼 수 있는 시어로 형상화한 '시적 산문'인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편의 단편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여있는데, 영혜의 이야기를 자기들의 시점으로 설명해 주기 때문에 따로 읽어도 한 편의 완결된 소설이다. 주인공인 영혜를 둘러싼 인물인 남편('채식주의자'의 화자), 형부('몽고반점'의 화자), 언니('나무 불꽃'은 3인칭이지만 인혜의 관점)의 서술에 의해 주인공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그리고 가끔 주인공 영혜의 독백이 등장하지만, 역시나 독자가 이해하기엔 부족한 서술이다. 읽는 내내 불안했고, 난감했고, 각자의 세계에 갇혀있는 우리가 다른 세계에 갇혀있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것이 불안정한 시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채식주의자」 P. 19
영혜의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은 남편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어느 날, 가족 모임에서 아버지는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에게 고기를 먹을 것을 강요하며 폭력을 휘두른다. 아버지의 강압적인 행동에 영혜는 발작을 일으키며 과도로 손목을 긋는다. 폭력에 대한 저항이고, 고깃덩어리를 입에 넣은 자신에 대한 가학의 결과였다.
영혜의 아픔을 들여다본다. 영혜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안락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무방비로 노출된 폭력, 불안정한 세상이 던지는 폭력,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 국가가 주는 폭력까지 안전한 곳 없이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기도 하다. 영혜의 아버지가 가부장제의 폭력이라면, 어머니, 남편, 형부와 언니도 각자의 방식으로 오해, 혐오, 욕망, 동정 등 모두들 그럴싸한 이름으로 영혜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의 장인이 반항하는 처제의 뺨을 때리고 우격다짐으로 입 안에 고깃덩어리를 밀어 넣은 것은 아무리 돌아봐도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섬뜩하게 기억하는 것은 처제의 비명소리였다. 고깃덩어리를 뱉어낸 뒤 과도를 치켜들고 그녀는 가족들의 눈을 차례로 쏘아보았다. 흡사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그녀의 눈은 불안정하게 희번덕이고 있었다" 「몽고반점」 P.81
단편 「내 여자의 열매」의 '아내'는 음식을 거부하면서 몸에 푸른 멍이 들기 시작하고 조금씩 식물로 변해간다. 멍은 일반적으로 외부와 부딪쳤을 때 생기는 상처다. 그러나 '아내'는 특별한 외적 충격 없이 온몸에 멍이 든다. 『채식주의자』의 두 번째 이야기인 「몽고반점」에서 영혜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몸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 푸른 멍과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남아 있는 몽고반점은 어린 시절 받은 폭력이 외부로 발현된 상처가 아닐까 싶다. 형부는 영혜의 몽고반점에 욕망을 품는다. 또 다른 폭력이다. 그러나 영혜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나무 불꽃」 P. 157
언니 인혜는 영혜와 남편의 관계를 목격하고 이혼을 한다.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점점 식물이 되어가는 영혜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보는 유일한 보호자다. 어린 시절의 인혜는 아버지의 폭력에 지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한다는 이유로 폭력에서 제외되었고, 그 덕분에 제일 만만한 영혜가 폭력에 노출되었다.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가정은 영혜에게 절대 안전한 곳이 아니었고, 인혜는 그런 상황을 그냥 묵묵히 견딘다. 영혜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녀가 형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인혜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런 영혜를 인혜는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폭력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낳은 셈이다.
살아가면서 어느 날 문득 내 안의 폭력성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폭력을 휘둘렀을지도 모르겠다. 방치와 회피로 또 다른 폭력을 휘두르는 영혜의 남편처럼, 나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상행동으로 간주해 버린 영혜의 어머니처럼, 이해하지 않고 폭력을 최선이라 미화하는 아버지처럼, '심미'라는 허울로 욕망의 폭력을 가한 형부처럼.
영혜가 살아가기를 바라는 우리들에게 마지막 장면의 앰뷸런스는 희망일까?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가 남긴 마지막 '열매'는 또 희망일까?
인혜는 춥지 않지만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스웨터는 모성일 게다. 모성은 어떠한 폭력성에도 사라지지 않는 원초적인 평화로움, 따뜻함이다. 또 영혜는 아무도 죽일 수 없는 자신의 젖가슴이 좋다고 했다. 폭력과 정반대의 모습, 젖가슴 역시 모성이다. 그런 가슴이 점점 야위어 가는 것을 슬퍼한다.
폭력에 쉽게 부서지는 연약한 존재들인 우리는, 그래도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현재 압도적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빼앗은, 국가 최고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에도 연약한 존재들의 연대로 평화를 찾아야 한다. 읽어내기에 녹록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 폭력을 가장 혐오하는 작가 한강의 고통이 읽는 내내 영혜의 등 뒤에서 느껴진다.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나무 불꽃」 P. 179
영혜는 식물을 꿈꾼다. 식물은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는다. 나무는 물과 햇빛 공기라는 자연만으로 살아가기에 영혜는 나무가 되기를 꿈꾼 것이다. 세상의 모든 폭력에 대한 해법은 자연의 모성이다.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진 끝에 내린 옹색한 나의 답이 되겠다.
'앰뷸런스'가 주는 희망을 품는다. 다가오는 봄 아내가 남긴 '열매'에 싹이 튼다. 초록빛의 불꽃 나무 영혜가 돋아난다.
#채식주의자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