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단편 소설 오상원의 <유예>를 보면 흰색(눈)과 붉은색(피)의 극렬한 대비가 강렬하다. 글로 읽어도 눈에 그린듯하게 잔상이 오래 남는다.
한강의 작품들을 통찰해 보면 그 역시 흰색과 붉은색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흰색의 원형적 상징은 순수, 결백이지만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죽음'과 '눈물'의 이미지다. 붉은색은 주로 열정과 젊음을 상징하지만 한강의 글에서는 '상처' '고통'등을 의미한다. 일반적 상징을 넘어 흰색과 붉은색은 작가 한강만의 퍼스널 컬러라고 할 수 있다. <흰>이 세상 모든 '흰' 슬픔을 이야기한다면 그녀의 다른 소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붉은색의 이미지가 선연하다. 그렇지만 한강의 '흰'은 차갑지 않으며, 그의 '붉음'에는 습기가 없다.
소설 <흰>은 작가의 언니,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숨을 쉬지 않게 된 아기를 애도하며 '흰'색의 이미지들을 모아 소설을 썼다. 모든 '흰' 것들은 슬프다. 배내옷 강보 젖 입김 서리 눈 달 소금 넋 나비 쌀과 밥 안개 파도 모래 수의 소복 재 등에 관한 65개의 짧은 글들이 그녀의 목소리처럼 나직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되었지만, 그녀의 '흰'이야기들은 한 편 한 편이 모두 시(詩)로 봐도 좋을 것 같다. 한강이 시로 먼저 등단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 그녀의 모든 문장은 시적이다.
이제 처음 허파로 숨쉬기 시작한 사람. 자신이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방금 무엇이 시작됐는지 모르는 사람. 갓 태어난 새와 강아지보다 무력한, 어린 짐승들 중에서 가장 어린 짐승. - <흰> '강보' 中에서
자신은 태어나기도 전 태어난, 두 시간 살다 간 언니와 낳자마자 딸을 잃은 어미의 슬픔과 고통을 애도하는 이 소설은 인간이 가장 나중까지 지니고 있을 눈물 속을 찰박찰박 걷는 느낌이다. 이 소설로 인해 그녀의 아픔에 '흰' 연고를 발라 상처는 아물었을지 모르지만, 그 흉터는 그녀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게다. 낳자마자 죽은 아기였던 언니의 고통을, 당시엔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이 조용히 글로 써 내려간 그녀가 '흰'그림자처럼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 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 <흰>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中에서
'흰'은 슬픔이다. 내게도 한강처럼 치유되지 못한 '흰'이 있다. 다음은 내가 쓴 에세이의 일부분이다.
'밤 열 시, 창을 닫으려다가 잠시 바람을 느낀다. 군청색 하늘에 하얀 달이 동그마니 솟아 있다. 그 아래 은빛의 세례를 받고 있는 화단이 고즈넉해 보인다. 그 평온함 속에 하루가 다르게 꽃잎이 벌어지고 있는 흰 목련 한 그루가 서 있을 게다. 어제도, 오늘도 그 곁을 지날 때마다 내 눈 속으로 차오르는 그 선연한 빛깔과 해낙낙한 무게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하얀 목련은 그저 피었을 뿐일 텐데, 내 가슴은 '쿵'하고 소리를 낸다.' -자작 에세이 <하얀 상처>중에서
어떤 색보다도 선명하고, 강렬하고, 그럼에 외면하고 싶었던 색. 한강의 <흰>이 모든 것을 감쌀 수 있는 흰 천 같다면, 내게 트라우마로 남은 '흰'은 목덜미에 닿는 눈처럼 선득하니 차가운 촉감이다. 나도 한강처럼 '흰'것에 대한 슬픔을 씻김굿 한 편으로 풀어낸다면 치유가 가능할는지.
우리 모두에게 한 가지쯤의 '흰'이 있다. 어쩌면 온통 '흰'뿐인 사람도, 아직은 이 세상에 없지만 곧 '흰'으로 태어날 이도 있을 테다. 그럼에 <흰>은 모두 각자 써내려 가고 있는 슬픔을 애도하는 한 권의 시이며, 우리의 상처에 바르는 '흰'연고다. 한강의 <흰>으로 인해 모두의 흉터가 조금이나마 옅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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