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듯 보면 건축과 인문학이 큰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실은 매우 관련이 깊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과 짓는 사람의 철학이 담기기 때문이다.
<빈자의 미학>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간 건축가 '승효상'의 건축 철학이 담긴 책이지만 그는 건축가이면서 인문학자였고, 철학자였으며 문장가였다. 이후 나는 그의 문장이 좋아서 <솔스케이프>를 읽고 있다.
"198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빈)로 유학을 갔다. 비엔나에 가서 건축가 '아돌프 로스'(20세기 초 활동, '장식은 죄악'이라 규정하고 일체의 장식을 제거한 집을 지었다)를 알게 됐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영감을 받아 모더니즘이 시작됐고 20세기 패러다임이 됐다. 아돌프 로스 이전과 이후 건축이 달라졌다. 건축가가 건축을 통해 세상을 혁명시킬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승효상
승효상 건축의 주제어는 '빈자의 미학'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다 돌아와 건축전시회를 열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말인데, 그 이후 줄곧 그의 건축 주제가 되었다. 그 철학을 바탕으로 '사유원', '하양 무학로교회', '독락당', '구덕교회', '봉하마을', '만취헌' 등을 설계했다.
승효상은 건축의 세 가지 요건으로 합목적성, 장소성, 시대성을 말한다. 우선 합목적성은 건축의 목적을 말하는데, 건축은 인간의 구체적 삶에 근거해서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하고 지향하는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답게, 학교는 학교답게, 집은 집답게' 그래야 건강한 건축이라고 말하고 있다.
건축이 놓이는 토지는 장소가 요구하는 특수한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이것이 건축의 두 번째 요소인 '장소성'이다. 땅은 그 많은 세월 속에서 수없는 사연들이 쌓이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 축적'되는 것이다. 그래서 승효상은 건축가를 일컬어 '땅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건축의 배경이 되는 시대성은 '시대를 관조하고 건축가 가진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작의가 투영된 사상적 배경'이라고 설명하는데, 승효상이 말하는 시대성을 제대로 관조할 수 있는 공간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 부산이라는 도시가 아닐까 싶다. 부산은 역사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도시다.
부산은 평평한 땅이 적다. 한국전쟁 직후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와 인구밀도는 높아졌는데 집을 지을 땅이 부족했다. 그래서 피난민들은 산비탈과 언덕에 집을 지었다. 피난민이었던 승효상의 부모가 정착한 땅도 부산 서구 대신동 구덕산 아래 경사진 땅이었다. 승효상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승효상이 건축한 부산 대신동의 구덕교회. 피난민인 아버지가 일군 구덕교회를 건축가가 된 아들 승효상이 설계, 재건축했는데 경사진 땅 위에 그대로 교회를 앉혔다
가끔 산책 삼아 가는 엄광산 꼭대기에 있는 꽃마을과 지금은 관광지가 된 감천동 문화마을은 승효상이 말하는 건축의 요건에 부합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가난한 집과 집이 어깨를 붙이고 빈자들이 살갗과 살갗을 맞대고 살아가던 곳. 그곳은 그저 지어진 집이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산 위에 얽기 설기 집을 짓고 그의 아들들이 돈이 생기면 벽돌 한 장, 또 돈이 생기면 비닐을 뜯어내고 유리 한 장 넣어 추위를 막던 가난한 삶이 그들의 집에 날짜 지난 신문처럼 더덕더덕 붙어있다.
이곳은 ‘가짐 보다는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 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했다. 그렇게 빈자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시간은 흐르고, 벗겨진 노란 페인트 위에 푸른 페인트를 칠하고. 그 위에 또 분홍 페인트를 칠하며 그들만의 미학을 이루며 살아왔다. 비록 지금은 슬럼 투어의 장소로 변해, 가난을 상품으로 내놓고 있지만 그것도 그들의 삶이 되어 그 땅에 쌓이게 될 것이다. 이곳 부산 언덕배기 위의 빼곡한 집들에서 승효상이 말하는 미학을 나도 본다. 가난했지만 역설적으로 땅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이해했고, 의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시대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 부산의 산복도로 언덕배기에 빼곡히 늘어선 집들이다. 여느 건축가도 흉내 내지 못할 미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빈자의 미학'은 가난한 사람의 미학이 아나라,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의 미학이다. - 승효상
부산 동구 산복도로에서 본 원도심우리의 도시와 가로街路는 얼마나 껍데기일 뿐인 그러한 벽체들로 뒤덮여 있는가.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형태, 시뻘겋고 시퍼런 색깔, 현란한 불빛, 각종 악취와 소음, 온갖 저열한 상업적 속성과 우스꽝스러운 졸부들의 가면으로 나타난 이 거리의 파편적 풍경을 향해 우리가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나는 침묵이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함을 믿는다.
<빈자의 미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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