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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Mar 29. 2022

우리 아빠

코로나 시대의 글쓰기


  심근경색을 앓으셔서 몇 년간 심장 상태가 좋지 못했던 아빠는 신체 삽입형 심장제세동기를 시술받기로 하셨다. 2-3일이면 퇴원도 하고 일상생활도 가능하다고, 별거 아니라며 웃으면서 병원에 가셨다. 자식들이 휴가내고 보호자 역할을 하겠다고 했음에도 코로나 시국이라 어차피 병원에 들어오지도 못하니 신경쓰지 말라하시면서...

  그러던 아빠는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사흘째 되던 날 재수술을 하셨고, 연로한 데다 독소를 걸러주어야 하는 신장 기능까지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겨가셨다. 병원에서는 긴급하게 가족을 호출했고 오늘, 내일 사이에 돌아가실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전해주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웃으며 혼자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셨을 아빠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오지 말라 하셨어도 휴가내고 병원 입구라도 가볼 걸, 이런 위험한 수술인 줄 알았다면 아빠를 말릴 걸... 갖은 후회를 했다. 가족들은 각자 PCR검사를 받고 이상없음을 확인한 후 중환자실 앞 가족 대기실에 모였다. 그동안 아빠에게 못 해드렸던 것들, 사랑한고 말하지 못한 것,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일, 그럭저럭 잘 지내시려니 하고 다른 어떤 일보다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부모님 안부에 대한 무관심을 고백했다. 그러다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해서 아빠를 보낼 수 없다며 울면서 밤을 지샜다.

  병원 측에서는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보자며 투석을 권유했다. 남들은 4시간이면 끝난다는 혈액투석이었지만, 심장도, 혈압도 약하고 모든 상태가 최악이었던 아빠에게는 24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신장투석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겪어보지 못해서 알지 못했으나, 무의식중에도 투석을 위해 꽂아둔 호스를 다 뽑아낼 만큼 고통스러워하셨다고 했다. 결국 마취를 하고서야 투석이 진행되었다. 막상 시작하니 그것으로는 부족해 24시간을 더 들여 아주 천천히 진행해야 했다. 이틀 간의 마취, 그리고 신장 투석. 아빠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면회가 불가하니 모두 중환자실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평소 남의 이목을 중시하던 나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간호사에게 아빠 얼굴을 보여달라고 사정을 했다. 아니 떼를 썼다고 하는 게 맞을까? 내 폰을 쥐어주고 영상통화로 제발 아빠의 얼굴을 비춰달라고 애원했다. 폰 너머에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아빠의 얼굴을 보고 온 가족은 또 눈물 바다가 되었다. 그런 모습이나마 아빠를 볼 수 있게 도와준 간호사님께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인사에 인사를 거듭했다.

  중환자실 의료진 중 누구라도 밖으로 나오는 것 같으면 벌떡 일어나 누구라도 붙들고 아빠의 상태를 묻고, 묻고, 또 묻고... 우리들은 진상 가족이 되었다. 진상이라고 욕해도 상관없었다. 아빠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다면. 어쨌건 결론은 사흘 입원 예정이었던 아빠는 2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입원을 하셨고, 살아내셨고, 퇴원을 하셨다.

  하지만, 식욕을 잃은 아빠는 모든 음식을 거부했고, 자꾸 차려다 바치려는 가족들에게 화를 내셨다. 엄마도 결국 폭발하여 이렇게 안 먹으면 죽고 말거라며 속상한 마음을 토로했으나 아빠는 도무지 드시지 못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속이 울렁거리는 상태가 지속되어 음식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무엇으로라도 연명할 수 있게 조금씩 계속 섭취해야 한다는 글이 있었다.

  식욕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으나 자녀들과 대화는 곧잘 하셨기에, 아빠 만나러 올 때마다 몸무게가 200g씩 늘어나 있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아빠 보러 안 온다고 엄포를 놓았다. 벽에 붙여둔 종이에 매일의 몸무게를 체크하여 기록해 두셨는데 갈 때마다 아빠의 몸무게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갈비뼈가 앙상하던 아빠가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보며 가족들은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다시 조금씩 부모님께 무심해져갔고, 또 당연히 잘 지내실 것으로 믿는 불효의 근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식들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하시는 아빠에게 지금 바쁘니 나중에 걸겠다고 해 놓고 잊기 일쑤였다. 자식에게 하는 것의 1/10만 해 드려도 세상 훌륭한 효자가 될텐데... 부모에게는 정성을 다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생사를 오간지 1년이 되셨고 이번에 80번째 생신을 맞이하셨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일가친척, 아버지 친구분들 모시고 잔치를 벌였을 텐데, 그렇게 하진 못했고 자녀들과 조촐하게 모여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이것도 효도라며 효도려나? 그간 사그라들었던 아빠에 대한 감사 – 우리를 키워내시느라 애쓰시고,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가 다시 버텨내어 이 자리에 계신 - 를 떠올리는 시간이 되었다. 3단 케이크와 꽃다발을 주문하고, 떡을 맞추고, 각자 선물을 준비했다. 아빠에게 드리는 편지를 낭독하며 온 가족은 눈물 바다가 되었고, 다시 웃다가 축하 박수 치고, 엄마는 남편을 위해 몰래 연습했다며 오카리나를 연주했고, 손자들은 자기들끼리 몰래 만든 축하 영상을 공개했다. 아빠는 그날 최고로 행복한 사람인 듯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

  코로나로 가장 함께 있어야 할 아픈 시기에 곁을 지키지 못했던 일, 가장 기뻐야 하는 날에 많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지 못했던 안타까운 순간들이 지나간다. 그럼에도 다시 마음이 느슨해져가고, 또 하루하루 무뎌져 가고 있다.

  부모에게 들쭉날쭉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딸이 되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과하게 노력하고 애를 쓰면 쉽게 지쳐버리니 오버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내가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빠, 식사하셨어요? 오늘은 컨디션이 좀 어떠세요?” 쑥스럽지만 이렇게 인사말이라도 건네며 전화드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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