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주변에서 ‘추앙’이라는 단어로 시끌시끌했다. 흔히 들어볼 수 없었던 말로 사전상에는 등록되어 있으나 일상용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사용해 본 적도 없던 단어. 최근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서 사용된 단어이다.
말도 안되는 단어를 사용했다며 그 작품을 그만 보겠다는 부류와 그 단어가 신선해서 그 이후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는 부류의 논쟁이 있을 정도의 큰 파장이 일어났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연애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가족에게서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번번히 실패하며 상처받아 한없이 의기소침해졌고 자신의 안전망 속에 쏙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였다. 어느 날 자신의 아버지 일을 도와주며,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술을 마시는 일꾼 ‘구씨’에게 당신의 인생이 달라지길 원하냐며 그럴 생각이 있다면 ‘나를 추앙해요.’라고 이야기한다. ‘당신이 나를 추앙하면 그 이후 당신과 나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사랑으로는 부족해요. 날 추앙해요.’라며 다시 반복한다. 추앙을 하는 자도, 추앙을 받는 자도 모두 달라질 거라는 의미를 담아.
종교적으로 위대한 성인 혹은 지도자를 향해 사용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있으나 내 주변의 일개 인간에게도 추앙을 보낼 수 있는 거였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이 몰아쳤다. ‘나를 추앙해요.’라는 주인공의 말을 듣고 순간 숨이 멎었다. 가슴이 벅차게 부풀어 올랐고,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함이 부푼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어려운 수학 문제가 한순간 말끔하게 해결되는 기분이랄까. 그러고 보니 내가 받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사랑이 아닌 추앙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랑의 양과 사랑을 받을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사랑의 보유량이 적은 누군가는 자기가 가진 전부를 내어 주었음에도 사랑 그릇이 큰 누군가에게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사랑 보유량이 많은 누군가는 적은 양을 주고도 사랑 그릇이 작은 누군가에게 넘치는 사랑으로 인식될 수 있겠지.
이것에 따르면 나는 사랑 보유량도 많고 받을 그릇도 큰 사람이라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진지하게 밀도 높은 사랑을 선사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감사와 사랑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이들은 부담으로 받는다.
한편, 나는 사랑 그릇이 무지막지한지 웬만한 사랑을 받아서는 쉬이 채워지지 않는다. 담고 또 담아도 부족한. 그래서 나는 내 모습을 애정결핍이라고 정의한다.
삼남매 중 둘째, 심지어 딸, 서러움이 많은 가족 서열로 자랐고, 연애와 결혼에서도 자기애 충만한 남자를 만나 모든 사랑이 자기에게 향하도록 길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그의 들러리같았던 마음.
내 그릇이 차고 넘쳐 ‘이제는 그만 됐어. 이걸로 충분해.’ 할 수 있을 만큼 채워져 본 적이 없다. 갈구하고 갈망해야 겨우 찔끔찔끔 주어지는 느낌. 또한 넘치는 사랑을 준다 해도 남들과 똑같은 양의 동등한 분배식의 사랑도 내 그릇을 채우지 못했다. 공평하게 기부받는 사랑도 노노.
한 번쯤은 잘했다, 못했다, 맞다, 그르다 판단하지 않고 온전히 내 편으로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사랑해 주는, 나를 추앙해주는 절대적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제대로 꽉 채워지고 나면, 그 ‘추앙’이라는 것을 경험해보고 나면 성에 차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을 감질 맛나게 찔끔찔끔 주워 먹었던 이전의 나와는 완전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것만 같다. 사랑이라는 족쇄가 풀어져 하늘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주인공처럼 온전히 ‘추앙’받고 채워지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