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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Dec 05. 2022

김장 랩소디

   찬 바람이 분다. 김장 시즌이 다가왔다는 증거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다 보니 전에는 관심없던 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매끼 김치없으면 밥을 못 먹는 스타일은 아지만, 별다른 반찬이 없을 때 김치로 만든 음식이 필요했고, 가끔 입맛이 없을 때 김치를 두어 번 집어 먹는 것만으로도 뱃속이 편안해진다. 이렇다 보니 김치는 없으면 불안하고, 떨어지면 안되는 필수품이 되어 있었다.

  여느 엄마들과는 달리 김치 담그는 일을 중시하지 않는 친정엄마와 시어머니가 계시는 통에 일찌감치 ‘김장은 내 몫이다’라고 생각했다. 나와는 다르게, 친구들의 엄마는 자식들에게 음식해다 나르는 게 삶의 낙이신지 온갖 종류의 김치를 자주 해다 주신다고 했다. 친구들은 엄마가 김치를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담근다며 짜증을 냈다. 그 말을 듣고 ‘이 인간들이 배가 불렀네. 엄마가 해주시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먹을 일이지. 안 먹을거면 나나 줘’ 하며 쓴소리를 날렸다. 김치는 마치 엄마의 사랑 같아서, 나도 그런 챙김과 사랑을 받고 싶은데 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배가 아팠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했던가. 사 먹든 담가 먹든 내가 해결해야 했는데 한번 배워두면 평생 써먹겠거니 싶어 여기저기 김장한다는 곳을 기웃거리고 귀동냥하고 인터넷을 검색해서 김치 담그는 법을 터득했다. 

  김치를 스스로 담근 지 10년 정도 되었다. 나만의 레시피도 생겼고, 맛있는 비법도 알아내어 꽤 그럴싸한 맛을 낸다. 엄마가 담근 김치를 먹으면 다른 데서는 못 먹겠다는 말도 안되는 아들의 칭찬을 듣기도 했다. 괜히 막중한 임무를 띤 것처럼 어깨가 무거웠다. 연중 행사라는 생각에 진지하게 일주일 정도는 머릿속에 김장 관련 시뮬레이션을 돌렸고, 전년보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맛있게 담가서 1년간 맛난 김치를 먹고 싶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작년 김장철에 갑자기 쏟아지는 업무들 때문에 김장을 하지 못했다. 한 주 한 주 미루다 보니 너무 늦어져 버렸다. 내가 만드는 대신 TV 홈쇼핑에서 맛있다고 광고하는 김치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맛에 ‘앞으로는 굳이 고생할 필요 없겠네’ 하는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김치가 물컹거렸다. 

  결국 꾀부리며 한 해 걸렀다가 ‘올해는 별수 없구나’ 싶어 김장을 하기로 했다. 점점 커나가는 아이들은 바깥 식사가 많아지고, 집에서 밥 먹는 횟수가 줄었으니 김치양을 줄이기로 했다. 양이 많지 않으니 생각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소일거리 한다는 생각으로 꼼지락거렸다.

  김장 직접 하지 말라고, 그냥 사 먹자고, 괜한 고생 사서 하지 말라며 집에서 하면 자기는 도와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남편은 진짜 아무것도 거들지 않은 게 미안했던지 작업이 끝난 큰 다라이를 씻어준다고 했다. 옷에 고춧가루가 튈까 봐 엉거주춤 씻어내던 남편은 “으악” 소리와 함께 허리를 반납했다.

  5년 전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고 조심조심 아껴왔는데, 출근도 못할 정도로 남편은 허리가 아프다 했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니 신경이 한쪽 허리와 다리를 누르고 있다고 했다. 김치가 뭐라고... 하지 말라는 걸 우겨서 한 죄책감에 미안해서 눈치를 봤다. 온갖 시중을 들고, 기분을 살피고. 아프다고 집에 일찍 와있다길래 얼른 조퇴 신청하고 집에 와서 뭘 도와줄까? 했더니 집이 더러우면 스트레스를 받는단다. 집을 치우랜다. 이야... 이건 뭐 거의 신병 기합 수준이네. 찍소리 못하고 집을 치우고 스트레스 받으시지 않게 깔끔시리 정리를 했다.

  남편의 허리와 맞바꾼 김치를 김치통에서 꺼내다가 곰곰이 생각했다. 내년 겨울엔 어떡하지? 내가 직접 김치 담그는 것을 고수할 만큼 진짜 맛이 있는지, 그럴 가치가 있는지 따져볼 일이었다. 잘 나아서 내년에 남편이 도와준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어쩜 또 다른 가족이 희생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런데 난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들 집에, 딸 집에 김치 담갔으니 가져가라 연락하는, 자식에게 맛난 김치로 사랑을 표현하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우선 올해 김치의 맛을 지켜보자. 남편도 맛을 보면 마음이 좀 누그러지겠지. 1년 지나면 허리도 괜찮아질지도 모르잖아. 먹을 만하면 또 담그고, 아님 포기하지 뭐. 그런데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언제는 산 김치보다 맛있다며, 갈수록 시원해진다며. 칭찬은 당신들이 해줬잖아. 잘하고 싶게 만들었잖아. 내년엔 통도 그냥 내가 씻을게. 이후에 어떻게 맘이 변할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난 내년에도 김치를 담그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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