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지나고 어둑한 하늘이 점점 바다 끝 어디선가부터 밝아져 오기 시작한다. 이제 나의 하루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피곤이 밀려온다.
내가 일하는 곳은 벽란도, 그리고 사람들이 며칠씩 묵었다가 돌아가는 원이라는 곳이다. 벽란원이라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곳이 있으나 내가 일하고 있는 원은 사설원으로 주로 장삿치들이 묵는다. 어제는 원나라 상인들부터 왜 나라, 그리고 대식국의 상인들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친 피곤한 하루였다. 북적북적한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한 그 나라의 말들이 오고 가고 서로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알아듣는 척하는 건지 연신 웃어가며 대화를 나누고, 반가워하는 것 같다.
민주 누이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이곳에서 함께 일해왔다. 제법 딱 부러지는 성격도 그렇고 뛰어난 언변도 그렇고 이 다양한 사람들을 잘 다루어왔다. 객들의 짐을 들어주고, 심부름도 하고, 음식도 채려 내는 등 온갖 잡일을 하고 있는 나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밤새 객들의 요구에 동분서주하느라 천근처럼 무거운 다리를 끌고 간신히 침소에 도착해 누워 잠을 청한다. 만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이 점점 내려오고, 이내 모든 것이 어둡게 되었으나 만근보다 무거운 나의 꿈들이 까만 하늘의 별들처럼 펼쳐진다,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언제 잠이 든지도 모르지만 깨어나는 시각은 늘 비슷하다. 해가 저 바다 끝 어딘가로 사라져 가며 진한 주홍빛으로 온바다를 물들 이때쯤이면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객들이 잔뜩 모여있는 항구로 가서 손님들을 호객하고 가격을 흥정한다. 다른 나라의 말은 할 줄 모르지만 손짓 발짓이면 웬만한 사람들과는 통할 수가 있다.
오늘은 얼마 전 개성으로부터 미리 큰방을 준비해도라는 연통을 받은 터라 다른 객들에게는 눈길을 주지도 않은 채 한 곳만 바라보고 있다. 늘 이곳 벽란도를 방문할 때면 우리 원에서 묵어가시는 개성의 큰 상인 공 씨 어르신이 오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 며칠씩 묵어가며 원나라 상인들과 거래를 하고, 멀리 대식국의 상인들과도 많은 무역을 한다. 개경에서도 큰 시전을 몇 채씩이나 소유하고, 교역에 쓰는 큰 배들도 몇 척이나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모으고 아끼며 공씨 어르신을 따라가려 애쓰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는 태산보다 높은 큰 산처럼 보인다. 멀리 공씨 어르신이 그의 수하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나와 허드레꾼들은 바삐 그들의 앞으로 가서 큰절을 올리며 짐을 받아 들고 수레에 싣는다. 오늘은 또 어떤 신기한 물품들을 가지고 오셨을까 하며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긴다.
앞서가는 가마에는 공씨 어르신의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지만 뿜어져 나오는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은 감히 말조차 붙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원에 도착하자 마중 나와있는 주인장과 민주 누이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공씨 어르신 일행을 맞이하고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며 미리 준비해둔 방으로 안내를 한다. 달이 머리 꼭대기에 있는 걸 보니 자정인 듯하다. 야식으로 건네받은 떡과 물을 손에 들고 원의 마당에 나와 밤바람을 쐬며 땀을 식혀본다. 어디선가 향긋하면서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꽃내음이 바람을 따라 나의 코끝을 자극한다. 어떤 꽃일까 궁금해하며 향기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본다. 뒤뜰 마당에 인공으로 파놓은 연못의 사이사이에 있는 이름 모를 꽃들에게서 이 자극적인 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생긴 것은 마치 별처럼 생긴 이 작은 하얀 꽃에서 어쩜 이런 강한 향기가 생겨나는 것일까? 그 많은 시간 동안 이곳을 오가면서도 이 향기를 기억하지 못했을까? 꽃이 궁금했던 것일까? 향기가 궁금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것들을 기억해내지도 못할 만큼 바삐 살아온 나의 세월들이 헛되여 보였던 것일까?
한참을 멍하니 꽃내음을 바라본다. 아니 꽃을 맡아본다.
“허허 뜬눈으로 호접지몽을 꾸는구나”
굵직하고 인자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바라보니 공씨 어르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한 손에는 찻잔을 들고서 언제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꽃의 이름이 궁금하더냐? 야래향이라고 한다. 밤에 꽃을 피우고 그윽하고 진한 향이 온 고을이 가득할 정도로 뿜어내지”
‘야래향. 야래향이라… 밤에 향기를 내는…’
“무슨 생각에 그리 빠져있었더냐? 꽃이 궁금해서 그랬던 거냐?”
“잠시 저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어떤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제가 품어온 꿈이옵니다.”
“꿈이라… 어떤 꿈이더냐?”
“저는 어릴 적부터 이 원에서 일해왔고, 지금까지 이곳에 있습니다. 여기 외에는 다른 곳은 알지 못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그저 밥이나 먹고, 술이나 마시다가 잠이 드는 그런 원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는 원을 꿈 구워 왔습니다. 오시는 객들마다 더 편안한 휴식과 마음까지 편안히 쉬게 하는 그런 곳이지요.”
“이곳은 가까이는 원나라부터 멀리는 왜, 그리고 더욱더 멀리 대식국에서도 교역을 위해 오는 벽란도다. 그 멀리서 오느라 많은 사람이 병들고, 지치고, 힘들어한다. 너의 꿈이 헛되지 않으니 능히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본 원의 구상이 있느냐?”
“예 밤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조금씩 조금씩 구상하고, 그림으로 남겨놨습니다. 하나 이 그림대로 세우고자 한다면 많은 재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볼 수 있느냐?”
“지금 당장은 보여드리지 못하옵니다. 단지 대략적으로는 이 흙바닥에 그려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려 보아라.”
구상한 그림을 그려본다. 이것이 맞을까? 늘 생각하고, 그려본 그림이지만 공씨 어르신의 앞에서 그려보려니 여간 손이 떨리는 게 아니다. 마음과 머릿속까지도 마치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것 같다.
“흠… 원나라의 누각 같구나. 이 누각을 몇 층까지 짓고 싶은 것이냐?”
“이 나라의 기술이 닿을 때까지 입니다.”
“하하하 너의 꿈이 무척 당차구나. 오늘은 밤이 늦었고 내일 나는 무척 바쁘다. 나는 장사치다. 너의 그 꿈을 내가 사고 싶구나. 내가 개경으로 돌아가고 나면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에게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해다오”
“네 알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하다.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꿈을 헛되지 않다 하는 사람은 공씨 어르신이 처음이다. 멍하니 야래향 나무를 보고 있다가 민주 누이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객들을 돌보기 위해 원으로 뛰어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