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출생의 비밀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다들 출생에 비밀이 있던데. 삼남매 중 조연에 가까운 나에게도 출생에 비밀이 생겨버렸다. 비밀이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지만.
1992년 10월 17일
“응애”
"10월 17일 07시 39분, 예쁜 공주님입니다."
제왕절개로 마취 상태였던 엄마는 다행히 이 말을 듣지 못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산모들은 출산하기 전에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없었다. 수십 년간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히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며느리가 아들을 못 낳으면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더 거세졌다. 게다가 만약 장남에게 아들이 없다면 장손을 못 낳았다는 굴욕까지 떠안아야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엄마는 이 불쌍한 며느리의 실상이었다. 첫째 딸을 출산하고 어렵게 가진 둘째가 유산이 되었다. 유산 자체도 괴로웠지만 둘째가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는 더욱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겨우 얻은 귀한 아기. 어떤 아이가 나오든 축복이라고 했지만 엄마와 아빠는 내심 아들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삼신할머니는 매정하게도 이번에도 딸아이를 보내주셨다.
마취에서 깨어난 엄마의 눈에 가장 먼저 팔에 채워진 팔찌가 보였다.
엄마는 "내가 여자라는 뜻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그만큼 믿기 힘들었나 보다). 그러자 옆에서 간호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산모님, 이번에도 예쁜 공주님이에요.."
현실을 깨달은 엄마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가 바로 "여자 아기"라는 뜻이라니.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쁨보다 앞으로 닥칠 시련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빠는 엄마를 위로하며 동시에 꾸짖었다.
"당신 마음은 알겠는데, 아기한테 사과해. 이렇게 이쁜 아기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그때의 나는 신생아답지 않게 눈을 부릅뜨고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들을 바랐던 아빠지만, 막상 아이를 보자마자 실망감, 아쉬움 같은 감정은 감히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기뻤다고 한다.
그리고 첫째와 달리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을 가진 나는, 그 어느 남아들보다 더 강해 보였다고 말했다. 엄마가 깨어나기 전, 짧게라도 나와 눈으로 교감을 했던 아빠는 가장 먼저 내 편이 되어주었다.
이 아기가 어린이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친척들이 집들이로 놀러 온 날이었다. 방에서 조용히 놀고 있는데 마루에서 엄마의 말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아주 어린 나이에 들었던 말이었다. 그럼에도 이 말 한마디는 내 마음속에 박혀서 30년 동안 떠나지 않고 있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나와 엄마의 인생이 많이 달랐을까? 나는 없어도 되는 그런 계륵 같은 존재인 걸까?라는 삐딱한 질문들과 함께 잊을만하면 나를 괴롭혔다.
그날의 대화들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나의 출생의 비밀이었다.
심리학의 대가 아들러는 ‘태어난 순서’가 아이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은 그 아이가 가진 유전적 기질보다도 훨씬 크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삼남매 중 둘째 막내딸로 태어난 아이를 ‘squeeze(끼어 있다)’된 위치에 있다고 표현했다.
위로는 이미 경쟁 상대가 있고 아주 잠깐 부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이내 '진짜 막내'에게 관심을 빼앗긴다. 덕분에 squeeze 된 둘째는 가장 빨리 부모에게 정서적 독립을 하고 어떤 일이든지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30대가 되어서야 나의 성향 중 90% 이상이 '둘째이기 때문에' 발전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매사 경쟁적으로 이기려 들고 피해의식이 다분하며 독특함을 추구하는 나의 모든 속성들은 '둘째'라는 선천적인 환경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둘째의 생존 전략은 첫째와 막내와는 다르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고 때로는 반항적이어야 한다. 목적은 단 하나, 부모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이번 브런치북은 전지적 둘째 시점에서 기록된 성장기이다. '둘째'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로 살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이다.
하지만 모든 에피소드들은 비단 둘째에게만 해당되진 않을 것이다. 둘째가 가진 특징은 이제 더 이상 ‘둘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시대에 사회 곳곳에는 삼남매 둘째 막내딸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엔 내가 주인공인줄 알았지만, 이미 내 앞에 경쟁자가 앞서있고 뒤에는 더 큰 놈이 따라오고 있다.
그렇기에 ‘삼남매 둘째 막내딸’은
이 세상에 있는 아웃사이더, 모서리, 조연 나아가 정체성에 고민이 있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시리즈가 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