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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니스 Jul 09. 2024

내가 언니보다 예뻐서 참 다행이다

Episode 1. 까만 첫째 하얀 둘째

살면서 ‘외모’가 얼마나 중요할까?

적어도 둘째인 나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성장드라마 반올림, 출처: KBS

14살의 나는 일요일 아침마다 오전 7시에 일어났다. 드라마 ‘반올림’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삼남매 중 샌드위치 딸이 주인공이라는 컨셉이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를 한층 더 즐기는 나만의 관전 포인트가 있었다. 바로, 옥림이(둘째)가 첫째보다 예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귀까지 나와 닮아 있어서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몰입해서 봤었다(애석하게도 귀만 닮았다). 첫째가 옥림이보다 공부도 잘하고 야무졌지만, 조금 더 예쁜 옥림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옥림이처럼 나는 언니보다 조금 더 예쁘게 태어났다.

세상 어느 아기가 예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예쁜 아기들 중에서도 ‘유독’ 더 예쁜 아기가 있기 마련이다. 신이 나에게 주신 확실한 은총은 나의 피부였다. 신생아 때부터 피부가 유독 하얗던 나에게 어른들의 시선이 몰렸다.


“어쩜 갓 태어난 아기가

주름도 없이 이렇게 이뻐요”

“외국 아기 같아요. 너무 하얗고 이쁘다”


덕분인지 엄마의 아들을 못 낳은 슬픔은 금방 거둬졌다고 한다. 아들 낳으라고 그렇게 구박하던 친할머니마저도 내 얼굴을 보고 나서는 아무 말도 안 하셨다. 심지어 친할아버지는 당신과 묘하게 닮은 나를 손주들 중에서 가장 예뻐하셨다.


언니는 첫 동생인 내가 태어나고 한 동안 말수가 줄었다고 했다. 4년 동안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점해 오다가 처음으로 관심이 분산되었으니. 첫째들이라면 모두가 겪는 성장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 동생이랑 외모 비교까지 해대는 못된 어른들 때문에 언니는 한동안 위축되어 있었다. 이내 잘 극복해 냈지만 언니도 ‘첫째라서’ 받았던 상처들이 있었을거다. 지금은 흉터가 되어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테지만.


샌드위치 둘째여도 조금은 덜 서러웠던 건 내가 언니보다 하얀 피부를 가졌었기 때문이었다. 바라던 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환영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나의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하얗고 예쁘장한 외모’는 나의 자존감의 근간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언니보다)예쁘다’는 말은 꼭 사수해야 했다. 그게 나의 자존감이자 정체성이었으니까. 언니가 나보다 피아노를 잘 치든 공부를 잘하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언니가 나보다 더 예뻐지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때 내가 크게 간과했던 사실이 있다. 얼굴은 커가면서 변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성형 기술이 발달할수록 언니가 나보다 예뻐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20살에 쌍꺼풀 수술을 한 언니는 얼굴이 180도 바뀌었다. 35살인 지금도 여전히 '미인' 소리를 들을 만큼 미모가 업그레이드 됐다. 떡상한 언니의 이미지는 나의 자존감에 생채기를 내었다.


반면 나는 (아직) 성형수술을 받지 않고 있다. 물론 나도 고치고 싶은 아쉬운 부위가 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연 미인'이라는 차별점이 나의 새로운 생존 전략이고, 언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을 있는 유일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30대에 접어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홀로 언니와 경쟁 중이다. 가끔 '언니가 더 예쁘네'라고 소리가 들려오면 슬며시 언니의 비밀을 누설하며 반칙행위를 한다.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죄책감은 딱히 없다. 여전히 나의 심보는 삐뚤어져 있나 보다. 언제 이 찌질한 둘째 컴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언니의 눈이 예뻐서 결혼했다는 형부한테 만큼은 비밀을 굳게 지켜주고 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페어플레이 정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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