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 막내 강퇴
교회에서 매달 생일자들에게 이 찬송가를 불러주었다. 대중가요라고 해도 될 정도로 유명한 찬송이다. 하지만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불편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사랑을 받는 게 뭘까?' 고작 초등학생인데도 꽤나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 같다.
그런 애들이 참 부러웠다. 존재 자체만으로 부모님의 기쁨이 되어주는.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구나' 싶은 그런 애들 말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지지와 사랑을 아낌없이 받으며 자라 온 친구들을 보면 나는 너무나도 작아졌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야 나의 이 콤플렉스는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짜가 나타나기 전에는 내가 가짜였는지 알 수 없다.
나도 나름 사랑받는 귀한 막내였다. 가족 모두가 나를 반겼고 경쟁 상대는 없었다. 내 앞에 ‘진짜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거대한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2년이 지나 고대하던 귀한 장손이 우리 집안에 태어나면서 나의 입장은 180도 달라졌다. 부모님은 (지금까지도) 동의하지 않으시지만, 나와 동생은 분명히 존재감부터 달랐다.
6년을 기다려 온 아들. 엄마는 동생을 ‘선물’이라고 불렀다. 동생이 아무리 공부를 못하고 사고를 쳐도 ‘그래도 내가 저 아들이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어’라며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엄마의 모습도 보았다. 그렇다. 동생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실체였다.
나를 낳았을 때는 울음부터 터뜨렸던 엄마였는데.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
이후에도 서운했던 기억들은 날이 갈수록 쌓여갔다. 동생은 우리 삼 남매 중 최초로 아기 침대에서 자랐다. 명분은 ‘둘째가 셋째와 터울이 얼마 안나서’라고 했지만 그리 와닿지 않았다. 동생을 반기는 친할머니의 표정은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마치 첫사랑을 보는듯 했다. ‘우리 장손’은 그의 별명이 되었고, 친인척들을 만나는 자리마다 가장 먼저 주목을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커가면서도 부모님은 항상 남동생에게 관대했다. 남동생의 성적표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성적을 잘 받아오지 않아도 사랑받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수 있다는 걸. 나는 행여나 미움받을까봐 겁이 나서 못했던 일들은 남동생은 과감하게 해냈던 것이다.
2년만에 막내에서 강제 퇴장을 당한 나는,
언니보다 예뻐야 하고 동생보다 성숙해야 했다. 이게 부모님의 사랑을 가져올 수 있는 나만의 생존전략이었다.
한창 자기계발에 빠졌을 때였다. 딱 하루 운동도 독서도 너무 하기 싫어서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염없이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데. 나를 짓누르는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친숙하지만 한 번도 정의해 본 적 없는 그런 감정. 그날따라 그 감정의 이름을 찾고 싶어졌다.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슬픔, 분노, 질투 이렇게 강력한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잔잔하게 은근히 나를 괴롭히며 자존감을 갉아먹는듯한 이 감정. 바로 '수치심'이었다.
내 안에 수치심은 언제부터 피어났을까?
처음으로 나의 존재가 민망하고 부끄러웠던 순간은 ‘남동생의 출현’이었다. 기억이 또렷하게 나지 않지만 그때의 감정은 가슴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수치심은 보편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수치심을 자주 느끼는 건 일반적이지 않다. 유년기 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이 적을수록 수치심을 자주 느낀다. 수치심을 가리기 위하여 자아는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임을 자주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수치심이 강할수록 표면적으로는 자기계발에 열중한다는 모순이 생긴다. (자기 기준에 따라) 발전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혐오하고 용납하지 못한다.
나의 성실함의 원천이 ‘수치심’이라는 게 인정이 되었다. 반박할 여지없이 그냥 공감이 되었다. 살다 보니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마치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내 열정의 이면에 상처가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일상 속 아주 작은 사건을 통해 나의 깊은 상처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 이후 나의 가치관은 바뀌어가고 있다. ‘무언가’를 이루는 것보다 그걸 ‘왜’ 이루고 싶은지 아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걸. 무엇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