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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네 Jun 26. 2021

행복이 보내는 편지 - (1)

고통에 대하여

안녕 친구야.


고통 속에 몸부림치느라 지쳐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고통이고 현재 내가 살아가는 것도 고통이고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들도 고통이 되기 마련이지. 지금 내가 싫어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옳을까? 혹은 인간관계가 힘들다, 돈이 부족하다. 병에 걸리면 어쩌지? 사고가 나면 어떻게 수습할까? 남들은 다 고민 없이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럴까. 내가 옛날에 왜 그랬을까? 내가 했던 그 선택이 과연 옳았던 걸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일이 과연 성공할까? 사실상 우리는 살아가며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근심 걱정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행복을 느낄 수는 없기 마련이야. 고통은 자기가 느끼고자 하면 모든 곳에서 느낄 수 있지만, 행복은 모든 곳에서 느끼고자 해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지. 이는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이 세상이 고통 속에 지어진 하나의 철장 같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본다. 고통은 우리의 인생에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나 행복은 무척 소극적으로 개입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현실이란다. 이는 마치 작은 생채기 하나에도 우리는 고통을 느끼며 약을 바르지만, 작고 소소한 행복에는 담담하게 대처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우리의 뇌리에 남아 두고두고 스스로를 괴롭히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추억이 되어 아련하게만 남을 뿐이지.




고통은 적극적이나 행복은 소극적이라는 사실은 일상생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하러 나가 고된 노동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가족들을 보며 느끼는 약간의 뿌듯한 감정과 안정감을 위해 우리는 하루 최소 8시간을 노동하는데 바치고 있어. 이 사실만 보더라도 현실의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 잠시간의 안정된 마음과 행복을 느끼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작은 행복을 느끼기 위해 압도적으로 많은 고통을 느끼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이 세상일 따름이야.




인생이란 본래 자기가 그 상황에 처해있으면 좋은지 나쁜지 모르고 시간이 지나서야 그 상황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를 평가할 수가 있어. 이 말을 해석하자면, 행복에 겨워 있을 때는 행복한 줄 모르고 살다가 시간이 지나 자기가 고통 속에 살 때, 그제야 자기가 살았던 과거가 행복했다는 걸 알게 되지. 또한 자기가 고통 속에 살다가 행복 속에 살게 되었을 때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다. 이 두 가지 말을 설명하자면, 처음부터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은 고난이 닥쳐야 행복했다는 걸 느끼고, 처음부터 불행한 사람은 더 큰 비참함 속에서 살다가 잘 되고 나서야 과거를 돌아보며 행복을 찾는다는 의미야. 즉 자기가 행복한 상황에 처해있던 아니던 고통과 비교해야만 행복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이란다. 반면에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행복에는 고통이 필요하지만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게 되어 있지.




대게 우리는 고통을 최대한 줄이거나 피하기 위해 노력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통을 없애기 위해 하는 무언가가 잘 되었다고 여긴다 해도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 즉 지금은 안전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정말 이것이 안전할지 모른다는 의미인데, 결국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래의 일에 지레 겁먹고 또다시 이를 다루기 위해 고뇌하게 된다. 설령 내 대처는 완벽하다고 자부한다 한들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한낱 자기만족에 불과한 모습일 뿐이지. 즉 고통을 해결한다고 노력해봤자 다른 고통이 우리를 항상 괴롭히게 되어있단다. 우리가 해결한 고통은 그 형태나 겉모습뿐 본질은 바뀌지 않아.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란 휴전 없는 전쟁이며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세상에 맞설 무기를 들고 생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누군가는 삶이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막상 삶을 축복으로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어. 사람들은 흔히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고 시련이 있어야 발전하고 그것들을 반면교사 삼아 승리의 쾌감을 맛보고 행복을 감사하고 누릴 줄 안다고 하는데 난 그 말에 절반만 동의한다. 왜 우리는 고통이 없기를 바라 다가오는 재난들을 최대한 피하려 하지는 않는 걸까. 인생의 짐만으로도 우리는 벅찬데 왜 더 많은 짐을 구태여 짊어지려 하는 걸까.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인생의 짐은 스스로 짊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보태어지는 자질구레한 것들은 구태여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나를 무책임하다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한번 생각을 해보자.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은 책임지되 더 이상의 책임은 기존의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포기해야 한다면, 그런 회피는 정당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로는 세상에 가득 차있는 고통 중 가장 커다란 고통은 이것이라고 생각해.

‘운명의 모든 역경들 속에서 가장 불행한 종류의 불행은 행복을 알았다는 것이다’ - 보에티우스(철학의 위안)

누군가가 죽어 고통스러운 것은 그와 함께한 시간이 행복했기 때문이며,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현재의 생활이 고통스럽기 때문이고 미래를 바라는 것은 그 미래가 밝고 희망차 보이기 때문이라고. 과거에 내가 큰 행복을 느꼈고 현재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미래에 그런 행복을 누릴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면, 이처럼 불행한 것이 또 있을까. 행복을 항상 과거에 두고 있는 꼴인데 말이다. 행복을 느꼈어도 불행하고 행복을 느끼지 않았으면 그건 그 자체로 불행이 되는데 도대체 행복조차도 불행이 될 수 있는 현실이란 비참하기 짝이 없지. 그래서 사람들은 환상 속에 자신이 여기는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가정한 후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결국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행복하겠지, 권력자가 되면 행복하겠지부터 소소한 무언가까지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에 자신의 행복을 맡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인생의 허무는 극한을 더하는데, 그렇게 행복을 위해 투쟁하고, 기대하며 온갖 고통에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맞이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절망뿐이라는 사실이야.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철저한 사상적 배경이 없고서야 허무주의에 굴복하고야 말아. 결국 인생이란 죽음 앞에선 무엇을 해도 불행하기 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야 마는 것이지.      




이렇게 고통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어. 글을 읽으며 행복이 보낸 편지라고 해서 행복한 내용만 다룰 줄 알았는데 내용은 온통 고통이라 의문이 들었을 테지. 하지만 내가 말한 대로 사람은 고통을 알아야 행복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 마주치기 싫은 이야기들을 조금 했다. 지금까지 고통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다음 편지부터는 행복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주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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