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에 대한 생각
안녕 친구야.
전염병이 창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느라 고생이 많다.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라고는 해도 그 고통이 증대된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지. 혹여나 전염병에 걸리면 어쩌나, 내 수익이 줄어들면 어쩌나 하는 고심이 정말 많은 시대적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이런 일을 예견했겠으며 누가 이런 일을 생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이 현실이 되었으니 말이야.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좋지만 항상 미래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지. 미래를 향한 그 어떠한 대비도 완벽하다고 부를 수 없는 것이 세상 아니겠니. 오늘은 미래에 대한 글을 써보려 한다. 과연 우리가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이 유익할지, 미래를 모르는 것이 유익할지,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우리의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말이야.
먼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약 사람이 미래를 안다면, 그건 일종의 저주라고 부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만약 어떤 사람의 미래가 밝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맞이할 미래를 기대하며 행복을 그곳에 두고 있을 테지. 이는 즉,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 현재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로 현재를 도외시한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자신은 미래에 행복이 보장되어 있기에 지금 행복해할 뿐이니까. 이번에는 어떤 사람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암울한 미래에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전긍긍하며 미래보다 나은 현재의 행복조차 제대로 즐기지 못할 것임이 자명하지. 미래가 긍정적이라면 현재의 행복이 아닌 미래의 행복을 다져다 사용하고 미래가 부정적이라면 현재도 불행하게 된다. 미래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래를 알게 된다는 것은 현재를 살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게 되니까.
당연히 여기서 의문이 들기 마련인데, 도대체 사람의 생에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으면서 왜 지금의 행복을 누려야 하냐고 말이야. 당연히 우리의 삶의 본질은 고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러나 본질을 바꿀 수 없다고 해서 본질에 집착해서 파묻힐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일시적이며 얼마 되지 않는 행복을 누릴 때는 잠시 그러한 본질을 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짓눌려 미쳐버리고야 마니까.
알려고 묻지 말게, 안다는 건 불경한 일,
신들이 나에게나 그대에게나 무슨 운명을 주었는지,
레우코노에여, 점을 치려고도 하지 말게.
더 나은 일은, 미래가 어떠하든, 주어진 대로 겪어내는 것이라네.
유피테르 신께서 그대에게 주시는 게, 더 많은 겨울이든, 마지막 겨울이든.
지금 이 순간에도 티레니아 해의 파도는 맞은 편의 바위를 깎고 있네.
현명하게나, 포도주는 그만 익혀 따르고, 짧은 인생, 먼 미래로의 기대는 줄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인생의 시간은 우릴 시기하며 흐른다네.
제때에 거두어들이게 (carpe diem), 미래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으로 해두고.
호라티우스-송가(출처:위키피디아)
호라티우스의 ’ 카르페 디엠‘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지, 이에 따른 해석도 굉장히 다양하게 있고 말이야. 그러나 내가 원본을 가져온 데에는 이유가 있단다. 단순히 ’ 카르페 디엠’을 ‘오늘을 즐겨라’라고 해석하려는 의도가 아니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오늘, 지금’, ‘즐기다’, ‘매 순간이 소중하다’처럼 해석하는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도록 하자.
이제부터 내 생각대로 저 송가를 해석해볼게.
알려고 묻지 말게, 안다는 건 불경한 일,
신들이 나에게나 그대에게나 무슨 운명을 주었는지,
레우코노에여, 점을 치려고도 하지 말게.
더 나은 일은, 미래가 어떠하든, 주어진 대로 겪어내는 것이라네.
1~4 행은 미래를 알 필요가 없다는 구절이지 내가 아까 전에 말한 미래를 알아도 불행하고 몰라도 불행할 것이라는 주장과 비슷한 말이야. 1~2행은 우리의 운명이 있다면 그 운명이 무엇인지 알 필요조차 없다는 구절로 봐. 그리고 그 이유는 4행에 나오지. 다가올 미래는 우리가 예측이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하기에 모든 일들에 대비할 수가 없어. 결국 미래를 향한 대비란 인간의 상상력에 불과하니 나에게 다가오는 미래를 담담히 맞이하라는 뜻이야. 그리고 그렇게 미래를 맞이하는 것 외에 인간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니?
유피테르 신께서 그대에게 주시는 게, 더 많은 겨울이든, 마지막 겨울이든.
지금 이 순간에도 티레니아 해의 파도는 맞은 편의 바위를 깎고 있네.
5~6행은 인간의 수명에 대해 말하고 있지. 이번이 내 생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겨울이든, 지나가는 겨울이든 자연은 항상 그대로일 것이라는 의미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이루던 무엇을 해내던 항상 세상은 흘러가기 마련. 이런 세상에 구태여 의미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세상에 뜻을 두고 출세하려는 사람,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 그리고 그들이 자신이 원하는 이상에 다다르지 못해 좌절하는 모습과 그 이상을 향해 나가 가기 위해 포기한 여러 행복들을 마주치지. 그들이 자신의 야망을 성취한다면 좋겠지만 어차피 그건 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에 불과할 뿐 다수의 사람들은 헛된 정력과 시간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 현실. 만약 누군가가 그 꿈을 이룬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그는 노쇠하여 자신이 가진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곧 은퇴하고야 말 텐데.
현명하게나, 포도주는 그만 익혀 따르고, 짧은 인생, 먼 미래로의 기대는 줄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인생의 시간은 우릴 시기하며 흐른다네.
제때에 거두어들이게(carpe diem), 미래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으로 해두고.
그래서 7행을 보면 ‘포도주는 그만 익혀 따르고’ 구절로 시작하지. 익히는 시간이 걸려 맛있어질 때는 그 맛을 볼 사람이 사라져 있다는 뜻이야.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도 그걸 누릴 시간이 남아있지 않으면 이룬 들 무엇할까. 청춘은 다 사라지고 이미 노쇠하여 얼마 뒤 퇴장할 일만 남았는데 말이야.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 행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왜 ‘제때에 거두어들이게’라고 번역되는지 알 수 있어. 너무 미래를 추구하면 그 미래는 사라져 버리고, 지나치게 인생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본다면 그건 하루살이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내 생각에는 카르페 디엠의 뜻이 오늘을 즐겨라, 현재에 충실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항상 뭐든지 제 때에 즐겨야 한다는 의미라고 보인다. 분별없이 오늘을 헛되이 보내는 건 차라리 미래를 준비하는 것보다 못하니까. 또한 마지막 구절인 ‘미래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으로 해두고’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이나 과도한 기대는 언제나 사람을 배신하기 마련이니 가능한 정도까지만 미래를 대비하라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내가 생각해본 카르페 디엠이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을 희생하지 마라, 그렇다고 아무런 희생도 하지 마라는 의미는 아니란다. 어차피 이 세상은 네가 구태여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흘러가게 되어있다. 너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그것에 열중해라. 인생에 시간은 우리를 시기하여 나의 행복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현재에 충실하되, 그렇다고 미래를 포기하지 마라. 행복에 지나치게 집착해 매 순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항상 적당한 때에 행복해라. 한쪽 발은 현재에 두고 남은 한쪽은 미래에 두자. 그리고, 고통을 맞아들일 만큼 현명해져야 한다. 그것으로 인생은 충분하다.' 정도라고 본다. 여기까지가 내 짧은 생각이야. 네 생각은 어떠니?
부디 이번에 보내는 글이 너의 행복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