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 메이드?!

작은 세상이 보이는 마법

by 리을

숟가락을 잃어버렸다.

고작 숟가락 하나 잃어버린 게 글을 쓸 정도의 일이냐 싶겠지만,

뭐든 요긴하게 쓰던 물건이 자취를 감추면 아쉬움이 큰 법.


다이소만 가도 널린 게 숟가락인데?

그렇다. 하지만 내가 잃어버린 건 사람용이 아니다.

레미용, 즉 도마뱀을 위한 숟가락이었다는 게 문제인 거다.


한 뼘 길이의 진녹색 플라스틱 대에는

양쪽으로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숟가락 머리가 달려 있었다.

잘 만든 반죽(레미는 슈퍼푸드라는 가루를 물에 갠 반죽을 먹는다)을

한가득 떠서 눈앞에 놓아두면, 레미는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레미가 밥에 애착을 갖고 공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시기가

그 숟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상상해 보자면 이렇다.

부산스러운 집에 살게 된 지 몇 개월차인 나, 레미.

서성이는 인간들이 좀 귀찮긴 하지만, 생각보다 자유시간이 많다.

잠잘 때 대부분의 시간은 어둡고 고요한 곳에서 마음껏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배가 고프다. 이전보다도 훨씬 더 많이!

어라? 근데 이 쪼그맣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녀석은 한 입 거리처럼 보인다.

자세를 낮추고 녀석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그리고 다이빙하듯 몸을 던진다! 와앙-


그러지 않았을까...?

근데 작은 숟가락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고, 비슷한 걸 가게에서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그 숟가락의 가격은 1,900원.

하지만 배송비가 3,000원.

짠순이 엄마는 배보다 큰 배꼽을 도무지 볼 수가 없다.

어찌저찌 밥은 먹이고 있지만, 석연치 않다.


그러다 문득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명절에 받은 선물 세트였다.

간장, 식초와 같은 갖은양념이 든 선물 같은 상자를 보고, 난생처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 없이 내용물을 빼두고, 그걸 붙잡고 있던 검은색 플라스틱판을 빼 들었다.

그리고 가위로 그 판을 마구 잘라내기 시작했다.

길쭉하게 잘라낸 플라스틱의 양쪽 끝부분을 둥글게 다듬었다.

어느새 크기도 길이도 굵기도 다른 막대가 한 움큼 만들어졌다.

앞부분을 요리조리 구부려 약간 움푹하게 만들면..?

무려 일곱 개의 도마뱀 전용 숟가락이 뚝딱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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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 메이드?! 도마뱀 숟가락


어두운 색깔, 적당한 크기와 두께, 탄성력까지.

제법 마음에 드는 숟가락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레미도 새 숟가락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하다.


손바닥보다 작은 생명체가 마법을 부린다.

캔들홀더가 도마뱀 은신처로 보이고,

인테리어 조화가 따가운 빛을 가리는 가리개로 보인다.

돌과 나뭇가지가 놀이기구로 보이고,

숟가락을 위해 플라스틱판을 산산조각냈다.


자꾸 녀석의 작은 세상에 맞춰 다르게 보게 된다.

기꺼이 허리를 숙이고, 관심에도 없던 사물을 찬찬히 바라본다.

이 낯설지만 잔잔한 변화가 기껍고 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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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모드 vs 수줍모드



D+165


이름 : 레미

분류 : 파충류, 도마뱀

종 : 크레스티드 게코

모프 : 레드릴리

탄생일 : 25년 08월 13일

첫만남 : 25년 09월 07일

성별 : 모름

무게 : 아직 측정 불가

한 줄 메모 : 아- 조만간 귀뚜라미도 사보고 싶은데...ㅋㅋㅋ 아직은... 씁-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