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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Jun 01. 2023

하이얀

흔적 남기기

오랜만에 꺼낸 흰 반소매 티에 무언가가 묻어있다. 깨알만 한 크기의 누런 점. 딱 한 방울일 뿐인데 그보다 몇백 배나 더 넓은 공간 위의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만다. 슬쩍 보면 안보일까 괜스레 이리저리 흔들어 본다. 아쉬움에 참고 입어봤지만 결국 빨래통으로 던져버렸다. 언제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그 작은 흔적에 입고 싶었던 코디를 포기했다. 검은색 옷이었다면 저 정도 크기는 눈에 띄지도 않았을 텐데- 가끔 몇 없는 하얀 옷을 입을 때면 느낀다. 하얀색은 검은색보다 훨씬 가차 없다.


생각하지 않아도 하게 되는 아침 루틴이 생겼다. 알람에 따라 눈을 뜨면 눈곱도 떼지 않고 김밥을 만다. 은박지에 곱게 두 줄을 만들어 두고 나면, 짐을 챙겨 수영장으로 향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운동한 뒤에 찬물로 마무리 샤워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당근을 깎아 생으로 먹으면서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 그릇을 대충 싱크대에 담가두고, 커다란 유리컵에 물을 가득 담아 책상이 있는 작은 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명암도 없이 새하얀 벌판과 마주한다. 하얀 벌판 위에는 검은 선 하나만이 깜빡이고 있다. 망설임 없이 움직이던 몸과 마음이 그 앞에 멈추어 선다. 깜빡, 깜빡. 검은 선이 재촉한다. 그 성화에 못 이겨 무언가를 눌러 담아보지만, 몽땅 지워내고 만다. 완전무결한 하얀색은 쉽사리 흔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냥 쓰는 게 즐거워서 겁도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던 때가 있었다. 겁도 없이 자국을 남기고 그를 즐겼다. 흔들리는 지하철에서도 붙잡고, 여행길에서도 마주했다. 시간을 들여 쓰면 뭐든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그때. 지금은 왠지 아득하게 느껴진다. 꾹꾹 눌러 몇 글자 만들다 지워버리고, 다시 누르다 지우기의 반복. 애써 한 문단을 만들어 돌아보면 얕은 어휘, 반복해서 튀어나오는 접속사, 어색한 묘사가 눈에 밟힌다.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 몇 번을 고쳐보지만, 그런 표면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붙잡힌 것만 같다. 물 흐르듯 일상을 보내다가 이 하얀 화면 앞에서 얼어붙는 나를 보면 우습다가도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러니 완전무결한 하얀색을 탓하게 된다.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다 괜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린다. 어느새 시선은 창밖에 가 있다. 아차차- 하고 다시 초점을 맞추면 여전히 하얀 화면에 깜빡이고 있는 커서가 보인다. 무거운 마음이 옮아 열 손가락 모두가 무겁다. 무거움이 무서움으로 변할 것 같아 몇 번을 도망쳤다. 외면할수록 무서운 마음이 커지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이 되면 달아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바라다본다. 하얀 백지에 완벽한 글을 적고 싶어 한 글자도 적지 못하는 내 욕심을. 그럴 수 없다면 시도도 하고 싶지 않은 내 두려움을.


하얀 화면을 덮어 치워버리고, 색색의 펜이 가득 담긴 컵과 노트를 꺼냈다. 다행히도 노트는 부드러운 상아색이다. 깜빡이며 재촉하는 커서도 없다.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활짝 펴고, 이리저리 만지며 풀어본다. 조금 가벼워진 손으로 펜을 하나 고른다. 굵기와 색 모두 상관없지만, 연필과 샤프는 되도록 잡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글자든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흔적을 만드는 게 두려웠기에 거꾸로 지우지도 못하게 자꾸만 흔적을 만드는 상황으로 가본다. 인물의 이름, 성격, 갑자기 툭 튀어나온 대사, 적고 싶던 장면까지 적어본다. 웬일인지 손에 쥔 잉크 펜이 쓱-하고 미끄러진다. 똑같은 단어를 몇 번이나 반복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휙 멀리 그은 선 끝에서 생각지 못한 단어가 매달렸다. 손이 재빠르게 다른 색 펜을 찾는다. 새로운 단어 곁에 알록달록한 무언가를 적어내기 시작한다. 진부한 상상력도 맞춤법이 틀린 문장도 마구잡이로 놓인다. 삐뚤빼뚤 적힌 내 날카로운 글씨는 가릴 순 있어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손가락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렇게 자그마한 노트 한 장을 빼곡하게 채웠다. 알록달록함을 넘어 얼룩덜룩한 흔적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덮어뒀던 하얀 화면을 다시 펼쳤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풀고 키보드 앞에 나란히 내려놓아 본다. 아마도 망아지처럼 내달리던 때처럼 다시는 적지 못할지도 모른다. 계속 쓰면서 욕심 없이 쓰는 순간이 오긴 할까? 자그마한 일에도 승부욕이 발동하는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자꾸 연습해 보는 수밖에. 잘 쓰고 싶은 마음을 안고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를 이렇게든 저렇게든 해보는 수밖에. 이 또한 어디론가 가는 과정이겠거니 하고 빌어보는 수밖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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