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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지 Aug 21. 2021

영민씨에게

이메일




영민씨에게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까 말까 정말 고민 많이 했어. 손 편지를 쓰려다가 그걸 못 보내면 아쉽잖아. 그래서 이렇게 딱딱하고 정감 없는 한글 파일로 편지를 써. 당신이 내 감정을 못 읽도록 말이야. 내 일상이 조금이라도 궁금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소한 소식을 알려줄게. 은혜는 결국 나랑 헤어졌어. 당신이 그렇게도 미워하던 은혜는 당신이 떠나고 크게 죄책감을 느꼈어. 내가 은혜와 헤어지고 슬퍼하는 것까지 당신의 계획이었다면, 그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할거야. 은혜와 헤어지고 나는 좀 더 단단해졌어. 당신이나 은혜나 내게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었고 우리는 겨울을 같이 버텼어. 찬 바람을 막은 것,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해.


어쩌면 당신은 우리의 결말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지도 몰라. 당신도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 철중씨가 알려줬어. 우연히 집 앞에서 만나 소소하게 대화를 했거든. 횡단보도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기까지의 텀은 내가 철중씨에게 고양이가 지난 달 병원에서 35만원을 썼다는 것과, 은혜와 헤어져서 어쩌면 좋냐는 가식적인 위로와,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충분했어. 당신이 어떤 여자를 만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어. 그냥 아직도 가끔 내 이야기를 지인처럼 하는지 궁금했어.


영민씨, 사람들은 거짓을 진실처럼 꾸며서 말을 둘러대곤 해. 나는 언제나 영민씨의 그런 모습을 보면 어지러움을 느꼈어. 당신은 나를 사랑하면서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 은혜는 나의 모든 걸 인정해준 여자였어. 그러나 분명한 건, 난 당신이 남아있었다면 은혜와 만나지 않았을거야. 내가 늘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했지. 그렇다면 지금은 어때?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어? 당신이 만나는 여자가 나보다 더 낫다고 해도, 평생 마음속에 거짓을 품는 것이 행복해? 그건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거야. 그래 나까진 속여도 괜찮아. 그러나 영민씨 나는 당신이 자신만은 속이지 않았으면 해.


벌써 3월이야. 이렇게 뻔뻔한 이메일을 보내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그 말에는 아무 효력도 없으니까.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사랑했다는 말을 보낼게. 그 여자와 결혼을 하든 나를 지인처럼 둘러대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자신을 속이지만은 말아. 그날 밤 우리가 했던 말들 중에서 거짓이라곤 없었어. 난 은혜를 사랑하기 이전에 당신을 사랑했어. 그 때 연락을 끊지 않았더라면 난 당신과 계속 살았을 거야. 오피스텔 302호에서 말이야. 은혜와 헤어진 건 내가 양성애자라서인게 아니야. 은혜는 자기가 우리 둘 사이를 망쳤다고 생각했어.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어. 그냥 갠 내 표정만 보고 알았어. 당신과 사귀지도 그렇다고 사귀지 않은 것도 아닌 그 시간이 사라져버리고 나서의 황망해진 날 보고 말이야. 당신이 떠나고 난 이제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어져 버린 것 같아. 솔직히 화도 났어. 하지만 당신은 오해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을 가지고 논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게 복수할 필요 없어. 난 은혜와 헤어지고 전혀 슬프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수신 차단한 게 더 슬펐어. 그러니까 돌아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여자를 정말로 사랑해? 당신은 나에게 동성애자라고 울면서 말했잖아.

거짓말을 하면서 살 순 있어. 하지만 거짓을 말하며 사랑할 순 없어. 당신은 뭘 위해 살고 있어? 당신은 뭘 위해서 살고 있어? 난 그냥 당신이 솔직해지길 원해.

johun@xxx.com

2017.03.12









훈에게

    

 

네가 보낸 편지 잘 읽었다. 술 마시고 쓴 건지 울면서 쓴 건지 참 횡설수설해서 읽기 좀 힘들더라. 내가 뭔가 오해했다고 생각하나본데 너야말로 오해한 것 같다. 난 니가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니야. 은혜랑 사귀라고 멍석 깔아준 것도 아니고. 그냥 난 내가 참 싫었다. 지금 너 때문에 끊었던 담배가 피고 싶어져서 한갑샀다. 철중이랑은 마주쳐도 아무 얘기도 하지마. 갠 그냥 니 가게에 공짜 안주를 얻어먹고 싶은 것뿐이야. 그리고 사귄지 안사귄지 모르겠는 게 아니라 우린 사귄게 맞았고. 내가 멋대로 떠난 것도 맞아. 그냥 내가 나쁜거지 넌 너무 착했던 거고.


내 동생이 제작년에 결혼했던 거 알고 있지? 너 알바 못 빼던 날 말이야. 그래 눈 오던날. 끝나고 내가 바로 차타고 영화관으로 갔던 날. 팝콘 냄새 난다고 배고파졌다고 해서 저녁에 짜장면하고 짬뽕 시켜먹은 날. 뷔페에서 먹고 왔으면서 또 먹는다고 진짜 잘먹네 하면서 뭐라 했던 날. 그날 사실 뷔페에서 아무것도 안 먹었어. 결혼식에서 영준이 친구들이 나한테 인사하고 그쪽 부모님들 한복 입고 촛불 점등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붕 뜨더라. 뭔가 잘못된 것 같고. 지금 생각해보니까 잘못된 건 하나도 없었다. 걍 내가 존나 용기가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던 거지. 은혜랑 사귀라고 떠난 건 아니라고. 그리고 시발 넌 내가 거짓말쟁인줄 아나 본데 나 그렇게 쓰레기는 아니야. 나 아무랑도 안사귄다. 철중이 망상이야 그거. 근데 니는 술이나 쳐먹고 또 이딴 이메일이나 보내고. 너야말로 제발 잘 좀 지내라. 넌 어짜피 어리고, 나는 그냥 늙어서 누구 책임지고 그럴 힘도 없는 직장인이라고. 알았냐 훈아.


그리고 수신차단 한게 그렇게 서러웠냐. 미안하다. 근데 나는 존나 용기가 없어서 니 목소리 들으면 아무것도 못해. 일도 안돼. 그니까 그랬던 거야. 어짜피 읽지도 않겠지만, 잘 살아라 훈아.



youngmin@xxx.com

2018.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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