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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정원 Dec 02. 2023

김장 속에 가족의 온기를 담다.

 따뜻한 온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 겨울맞이 준비로 김장만 충분히 담가 놓으면 비교적 풍족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다. 영양소와 유산균이 풍부한 김치를 반찬으로 먹거나 싫증 나면 볶아 먹고 돼지고기 쑹덩쑹덩 썰어 김치찌개를 끓이면 완전 별미다. 그 외에도 콩나물을 넣어 시원하게 김칫국을 끓이거나 시어지면 만두를 만들기도 하고 김치를 쫑쫑 썰어 부침개를 부치면 겨울 간식으로 최고다.  여러 가지로 변신하는 김치 덕분에 반찬 걱정 없이 겨울을 지낼 수 있다. 준비와 담그는 과정에 손이 많이 가고 힘들어

사 먹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도 하지만 입맛에 맞게 이것저것 해 먹으려면 역시 집에서 담근 김치가 최고다.


 얼마 전 시골에 사는 지인이, 시골에는 흔하지만 도심에서는 비싸게 주고 야채를 사 먹어야 한다고 아깝다며 김치도 가져고 갈 겸해서 김장을 담그러 오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날짜를 맞추기도 힘들고 많이 먹을 것도 아니라 처음엔 사양했다. 그런데 당연히 오리라 생각하고 날짜를 절충하는 지인의 마음이 고맙고 미안해서 더 사양 못하고 바람 쏘인다 생각하고 가기로 했다.

 서둘러 간다고 갔는데 평일임에도 고속도로가 막혀서 시간이 늦어졌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2차선 좁은 도로로 들어서니 공기 냄새부터 상쾌하다. 제법 큰 개울 양쪽 옆에 삐쩍 마른나무와 간간히 까치밥만 남겨진 감나무가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는 청둥오리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다. 초행길인데도 많이 본 듯한 낯익은 풍경에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포근하고 설렌다. 시골집을 어떻게 찾을지 걱정했는데 신기하게도 네이버 맵에서 보여준 집과 똑같은 집이 보인다. 담을 대신 한 구상나무 사이로 보이는 김장하는 모습에 헤매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미 김장은 어느 정도 끝나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햇볕이 김장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준다.  아이 키만큼 높은 테이블 위에 두꺼운 비닐이 깔려 있고 무채와 여러 가지 양념이 버무려져 있었다. 

 TV 속에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하얀 배추에 빨갛게 물든 김치 속을 넣는 손들은 빠르게 움직이는데 내 손은 어쩐지 어설프고 굼뜬 것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사람들이 도움은 안되고 걸리적거리기만 한다고 비키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며 깔깔 웃던 언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장난하는 소리인 줄은 알지만 혹시라도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손을 움직여 본다. 살짝 고개를 들어 보니, 다행히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그러는 사이 통은 하나 둘 모두 채워졌다. 마지막으로 쭈욱 쭈욱 찢은 배추 잎에 남은 무채 속을 섞어 빨갛게 버무리고 까만 흑임자와 참깨를 듬뿍 뿌려 겉절이까지 끝나니 한쪽에서는 분주하게 먹을 준비를 한다.

 우리 집에서 세 토막은 내었을 법한 커다란 수육이 큰 솥단지에서 꺼내진다. 먹음직하고 알맞게 삶아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은 가지런하게 썰어져 배추가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마당에 빙 둘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쭈삣거리고 있으니. 많이 먹으라며 겉절이에 수육을 싸서 입에 넣어 준다. 수육을 싸서 먹는 재미와 맛이 일품이다. 무엇보다 누나 김장을 도와주겠다며 휴가까지 받고 온 지인의 남동생 부부와 멀리서 온 지인의 친구, 마을 분까지 옹기종기 빙 둘러 화기애애하게 정담을 나누며 김장하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하다. 대부분 번거로운 것이 싫다고 혼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김장은 이렇게 하는 거다. 이런 것이 사람 사는 재미이고 모습인 것 같다.


 해마다 김장을 담글 때가 되면 엄마 생각이 난다. 요즘은 김장 안 담그는 가정도 많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1월 마지막 주일부터 12월 초는 김장 담그는 시기다. 년 말이 가깝다 보니 김장 담그는 날과 모임 날짜가 겹칠 때도 있다.

 을씨년스러운 날 토요일 오후였다. 아마도 엄마는 가족이 모두 있는 날을 김장하는 날로 잡은 것 같다. 그런데 김장을 하러 나온 오빠 부부의 멋있는 옷 차림세가 이상하다. 김장을 도우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관 앞으로 걸어가며 모임이 있어 나간다고 인사를 한다.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잘 다녀오라고 하시더니 오빠 부부가 나가니까 나에게는 나와서 김장 담그는 것을 배우라고 하셨다. 모임 나가는 며느리에게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시험 공부하는 딸에게 김장을 배우라는 엄마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엄마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고 화가 나서 “지금 안 배워도 되는 딸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엄마 며느리나 잘 가르치세요”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말에 화가 난 엄마는 며느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까지 합해서 바가지로 혼을 내셨다. 한마디로, 계집애라고 인정머리가 없고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엄마 가슴을 콕콕 찌른다고 하셨다.  나는 화가 나고 마음이 불편해서 결국 시험공부도 제대로 못했다. 엄마는 혼자 김장을 다 하시고는 저녁에 허리와 어깨가 아프다고 끙끙거리시며 찜질을 하셨다. 엄마 마음은 딸이 이해를 잘한다는데 정말 인정머리 없는 딸이다.

 아무 말 말고 힘든 엄마를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그때 왜 그랬을까 두고두고 미안하고 후회가 된다.


 많은 김치를 혼자 담기 힘들어 당연히 도와주리라 생각하고 김장하는 날을 토요일로 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외할머니와 친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김장 담그던 시절이 그리워 가족이 모두 있는 날로 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들, 딸, 며느리가 빙 둘러앉아 떠들며 화목하게 김장 담그며 지인의 집처럼 배추쌈을 싸서 서로 맛 보라며 입에 넣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 세월을 되돌리지 못하는 시간이 되니 뒤늦게 엄마가 이해가 된다. 

 점차 가족이 모두 모이는 기회가 줄어들고 여럿이 모여 복짝거리는 것보다는 조용하게 있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되는 세상이다. 점점 사라져 가는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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