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지도사자격증을 향하여
“‘안전’할 때, ‘안전’ 한자는 뭐지?”
“편안할 안, 온전할 전.”
“‘교육’할 때, ‘교육’ 한자는 뭐지?”
“가르칠 교, 기를 육! 우와! 오늘 나 문제 다 맞히는 거 아니야?”
아이가 한자 자격증 시험을 치르러 가는 길. 우리 차 안은 막바지 벼락치기가 한창이다. 어느덧 아들은 세 번째 한자 자격증 시험을 맞이했다. 1년에 한 번씩 마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아이가 1년간 한자 공부를 한 결과를 꽃피우는 날이다. 아이가 한자 자격증 시험을 치르게 된 건 우연히 아이가 7살 때, 유치원에서 한자 자격증 8급 합격증을 들고 오면서부터였다. 아이는 합격증과 함께 한자 자격증 시험에 만점으로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추가로 주는 우수상 상장도 받아왔다. 행여 어린 나이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집에서는 한자 자격증 시험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는데, 만점이라니…. 나는 얼떨떨하면서도 아이와 마음껏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그 후로 아이는 매년 한 단계 높은 한자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도 한자급수시험을 치르고 한 달 뒤, 우리 집엔 합격증과 함께 만점 우수상장도 도착했다. 아이는 매일 나와 함께 한자 공부를 하면서 때로는 지겨워하기도 하고, 잘 외워지지 않는 한자를 만나면 분노를 쏟아낼 때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스스로 알기에, 연이은 합격의 기쁨을 기억하며 꾸준히 공부하는 대견한 아들이다.
“집에서 엄마표 공부 뭐 가르쳐?”
“수학이랑 국어랑 한자 자격증해요.”
“벌써? 안 힘들어해?”
주변에서 아이가 집에서 어떤 공부를 하는지 물어올 때면 난 어김없이 핀잔을 들으며 대화를 마친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자격증 시험에 매진하는 것 아니냐며 마치 내가 극성엄마인 것처럼 주위의 걱정을 산다. 사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엄마들은 대개 두 부류이다. 이미 방과 후 프로그램이나 학원을 통해 대부분의 교육을 시켜서 집에서 특별히 공부를 봐주지 않는 상황이거나 혹은 저학년까지는 무조건 놀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집에서 아이와 따로 공부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니 그들의 눈엔 내가 벌써부터 자격증 운운하는 엄마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유난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그저 엄마로서 아이가 흥미를 가지는 것, 성과를 보이는 일을 조금 더 확장시켜 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썩 좋지 않다만 내 주위를 둘러봐도 객관적으로 내가 유독 공부를 많이 시키는 축에 들지도 않는 듯하다. 또래 다른 친구들의 사교육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으로 경악스러울 때가 더 많다. 우리 집에서 아이가 하루에 정해진 문제집을 다 풀어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미만. 그리 길지 않은 공부시간이다. 아이가 학원에 다녀온 후,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가 저녁식사 전까지 공부를 한다. 만약 오늘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공부를 마쳐야만 볼 수 있는 유튜브 이용권 15분이 사라진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지켜온 이 루틴은 지금까지도 어려움 없이 잘 지켜지고 있다. 아이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내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늘려볼까 내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아직은 잘 참고 있다. 내 목표는 아이의 학습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때의 얻는 성취감과 아이가 그 시간을 지켜내는 인내를 기르는 것임을 매일 명심하는 중이다.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에 ‘중식 제공’을 보고 ‘왜 중식(중국 요리)을 제공하냐’고 하더라.
‘교과서는 사서 선생님께 반납하세요’라는 글을 보고 교과서를 사서 반납하는 일이 있었다.”
-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 204회 조병영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지난해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 프로그램에 출연하신 조병영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님이 밝힌 일화다. 그리고 지난 8월 29일,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제4차 성인문해능력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은 할 수 있으나 문해력이 낮아 이를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성인이 231만 명이라고 한다. 충격적인 수치다. 우리 사회에 책을 읽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면서 문해력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성인이 많다는 것이다. 씁쓸하지만 이것이 현대인이 가진 문해력 수준의 현주소다. 당장 나부터도 책 읽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고, 책보다는 각종 영상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고 여가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책 보다 간편하고, 빠르고, 내용이 쉽다는 장점 때문이다. 반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문해력과 감수성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어느 쪽이 좋다, 이쪽이 낫다’라고 단편적인 답을 내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시대에 맞춰 생활 패턴은 물론 추구하는 가치관도 유연하게 변화를 맞이하는 현상의 한 부분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에게 ‘지금은 AI 시대니까 이렇게 공부해’라며 태블릿만 쥐어주기엔 스스로 석연찮은 면이 있다. ‘나 때는 이렇게 공부해서 그나마 이 정도의 문해력인데…’ 싶은 아쉬운 마음이 남아서다. 이것이 아이의 한자공부를 내가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엄마의 성향에 따라 교육관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며, 각자의 교육 철학을 존중한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한자 자격증 시험을 본다고 했을 때, 난 내심 반가웠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 한자 공부에 빠져있던 때가 생각 나서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서예학원에 갔다. 성질이 급하고, 참을성이 부족한 오빠가 서예학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나도 오빠를 따라 함께 다니게 됐다. 할아버지 원장님께 붓글씨도 익히고, 천자문을 외우며 <논어>, <맹자>를 공부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배운 구절들이 주옥같은 깨달음의 집합체인데, 당시 초등학생에게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될 턱이 없었다. 그저 내 옷에 먹물이 튀지 않게 조심스럽게 벼루 한가득 먹을 가는 데에 더 집중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서예학원을 3년간 다니며 내게 남은 제일 큰 성과는 한자 급수 자격증이었다. 나는 1년에 두 차례씩 단계를 높여가며 한자 자격증 시험을 도전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사단법인 한국어문회에서 발급하는 공인 민간 자격 준 3급 시험을 합격했다. 약 2,500자 정도의 한자를 읽고, 쓰는 급수였다. 덕분에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언어 영역을 공부할 때도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한자어를 옥편 없이 해석할 수 있어서 공부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생소한 단어라도 앞뒤 맥락과 한자를 떠올리면 비슷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이점이었다. 김선영 작가의 <어른의 문해력> 책에 따르면 우리말 중 한자어의 비율이 57%라고 한다. 우리말에는 순우리말인 고유어나 혼종어, 외래어보다 한자어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어에 능통하면 우리말을 더 쉽게, 더 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한편 내가 초등학교까지 한자 자격증 시험을 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는 ‘지금 나를 엄마처럼 공부시키려는 거야?’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엄마보다 더 많이 배울 거야!’라며 금세 승부욕에 불타오른 모습을 보인다. 엄마로서 대단히 반가운 승부욕이 아닐 수 없다. 사실은 어쩌면 이 모든 게 정말 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릴 때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유리하고 효율적인지 알기에, 아들의 공부는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한자는 그 자체로 특정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말의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고,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울 때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배움의 좋은 점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못하고,
좋아만 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보다는 못하다.
- 임성훈 <살면서 꼭 한 번은 논어> 중에서
<논어>의 한 구절이다. 우리가 흔히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배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배우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데다가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와 함께 한자 공부를 하면서 이제 나도 한자를 다시 배워보면 좋겠다는 학습 욕구가 생겨나는 요즘이다. 마침 한국어문회에서 주관하는 아이의 한자 급수 시험을 접수하고, 홈페이지를 살펴보다가 한자지도사자격증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자급수시험과 마찬가지로 사단법인 한국어문회에서 주관하는 시험 중 하나로, 1년에 4차례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한자지도자자격증은 한자어를 지도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갖추고, 한자교육프로그램을 분석 및 개발과 평가를 할 수 있는 한자 지도사를 배출하기 위한 민간자격증이다. 배급 한자 수에 따라서 초·중·고급으로 나뉘며, 추후 학교나 사설교육기관, 기업체 등에 취업해 한자교육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것이다. 이제 내년 여름이면 아이는 한자 자격증 준 6급에, 나는 한자지도사자격증에 도전해볼까 한다. 아들의 도전이 엄마의 도전을 불러왔다. 전업주부로 살던 내 인생에 이 얼마만의 공부인가. 정말 오랜만에, 그것도 다시 한자 공부라니… 아직 낯선 마음에 떨림과 설렘이 공존한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공부에 대한 걱정,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보다는 공부하는 과정을 기대하는 마음이 더 크다. 내가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보내며 든든한 동지애도 느끼고, 돈독한 유대감도 쌓아가는 소중한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해서다. 함께 합격증을 받아 들 날을 고대하면서 매일매일 즐거운 배움을 이어나가야겠다. <논어>의 구절처럼 배움을 즐기는 사람이 되자! 나는 이제 공부하는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