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꿈을 좇는 여행(1)
하늘색 페인트를 들이붓고, 하얀 솜을 흩뿌린 듯 끝없이 펼쳐진 괌 하늘.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부터 철썩, 처-얼썩 파도가 넘실댄다. 맑은 하늘과 대비되게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검푸른 바다 위, 우리 가족은 작은 페리에 서 있다. 아직 두 돌이 채 되지 않은 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 바다를 구경한다. 그러던 찰나, 원주민 페리 선장님이 소리쳤다.
“여깃써-ㄹ, 고래야! 고래!”
어눌한 한국어로 “고래”를 연신 외쳤다. 선장님이 가리킨 바다 위, 진짜 고래가 나타났다. 나는 아이가 눈에 고래를 가득 담을 수 있도록 아이의 눈에서부터 저 바다 위 점프하는 돌고래까지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옮겨줬다. 아이가 처음으로 고래를 직접 만난 순간이었다.
“웅, 고-대, 고대야”
아이는 고래를 발견하고, 아직 여물지 않은 발음으로 고래를 불러본다. 그러곤 이리 오라고 애타는 손짓을 계속한다. 첨벙첨벙 날렵한 몸으로 점프를 선보이던 돌고래 가족은 어느새 저만치 헤엄쳐갔다. 우리 가족은 고래와의 짧은 만남에도 매우 행복했다. 바다 위를 떠돌면서 돌고래를 찾는 ‘돌핀 투어’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탓에, 돌고래를 만날 확률이 높지 않은 상황이었다. 낮은 확률이지만 그래도 돌고래를 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내가 산후우울증을 겪으며 마치 탈출구처럼 꿈꾸며 계획해 왔던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이 고래를 만남과 동시에 성공이라는 도장을 받은 느낌이었다. 내가 한창 우울했던 시절, 알게 된 정보 중 가장 반갑고 유용한 정보가 바로 항공사마다 유아 요금이 존재한다는 것. 유아 요금은 24개월 미만의 아기가 국제선 항공기를 이용할 때 성인 요금의 10% 정도만 부담하는 것이다. ‘수수료 수준의 항공권 티켓을 준다고?’ 나는 놓칠 수 없는 기회라 여기고, 틈틈이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을 계획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첫 해외 여행지로 괌을 결정한 데는 순전히 아들의 고래 사랑 때문이었다. 고래를 직접 만나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돌핀 투어’가 있는 괌으로 떠난 것이다.
아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유난히 고래를 좋아했다. <뽀롱뽀롱 뽀로로> 애니메이션을 틀어도 고래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반복해서 보고, 가사에 ‘고래’가 나오는 삽입곡을 자주 들었다. 집에 있던 자연 관찰전집 중에서도 고래 편은 하도 자주 봐서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인형을 사도 고래 인형을, 옷을 사도 고래 그림이 있는 것을 골랐다. 아들과 함께 알라딘 서점을 자주 방문했었는데, 그때마다 아들은 항상 고래 책 한 권씩 가져왔다. 큼지막하게 고래가 그려진 그림책부터 글씨가 깨알같이 빽빽한 고래 백과사전까지 고래 책이라면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수많은 고래 종류 중에서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고래는 바로 범고래였다. 까만 몸통에 등허리와 배만 하얀 무늬를 가진 범고래는 바다의 포식자로 알려졌다. 범고래는 등지느러미 길이만 1m 이상, 몸길이는 7m 이상으로 거대한 몸집을 가졌고, IQ 80 이상으로 먹이에 따라 전략적인 사냥 기술을 구사한다고 한다. 아이는 범고래를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차가운 바다에 분포돼 살아가는 범고래를 바다에서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 안타깝게도 아이와 함께 갈만한 범고래 탐사 투어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유튜브를 통해 미국 올랜도 씨월드에서 하는 범고래 쇼를 보게 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책에 등장하는 조련사와 함께하는 그 범고래다. 아이는 범고래쇼 중에서 커다란 범고래가 물 위로 점프하며 관람객들에게 물 폭탄을 선사하는 장면을 제일 재밌어했다. 그 뒤로 아이는 욕조에서 목욕할 때마다 범고래 쇼 음악을 틀어놓고, 온갖 범고래 피규어로 손수 범고래 쇼를 하며 놀았다. 아이는 범고래를 정말로 만나면 너무 무서울 것 같다고 하면서도 범고래를 만나면 어떨까 흥분과 설렘 섞인 모습을 보였다. ‘그래. 이것도 다 한 때야.’ 생각하면서 우리 부부는 범고래를 만날 수 있는 수족관을 찾아보았다. 그중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은 일본 나고야에 있는 ‘나고야항 아쿠아리움’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두 번째 해외 여행지는 일본 나고야로 결정됐다. 그런데 여행 전날 문제가 생겼다. 여느 때처럼 어린이집 일과를 마치고, 어린이집 앞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가 발을 잘못 디뎌 그만 앞으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미끄럼틀 손잡이에 얼굴을 정면으로 부딪쳤다. 다친 부위는 코와 눈 사이, 3cm 정도 상처가 생겼고, 그 주위가 아이 주먹만 하게 부어올랐다. 나는 펑펑 우는 아이를 데리고 곧바로 병원을 찾았다.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 내일 비행기 타도 돼요?”
아이도 스스로 걱정이 되긴 했나 보다. 평소 낯을 많이 가리는 아들이 먼저 의사 선생님에게 말하는 일이 별로 없는 터라, 갑작스러운 아이의 첫 물음에 난 놀라기도 하고, 황당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는 피가 나고, 얼굴이 아픈 것보다 범고래가 우선이었나 보다. 엑스레이를 찍고 다시 대기하는 사이, 아이는 여전히 걱정에 휩싸였다.
“나 범고래를 보러 가야 하는데! 흐아아앙.”
“비행기 타도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 아이는 크게 손뼉 쳤다. 엑스레이 판독 결과, 다행히 얼굴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상처도 봉합 수술을 할 정도는 아니란다. 진통제와 연고를 처방받고 약국을 나서며 아이 얼굴엔 어느새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다음날 우리는 무사히 나고야로 떠났고, 나고야에서 아이가 그토록 바라던 범고래를 만났다. 가까이에서 볼 때는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의 범고래였다. 범고래를 바라보며 아들의 눈은 반짝였고, 입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드디어 아들의 소원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 역시 행복했다.
나고야를 다녀온 뒤로 아이는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범고래를 만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유튜브와 책으로만 보았던 범고래를 직접 마주한 장면이 아주 강렬했나 보다. 더 이상 범고래를 보러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가족의 고래 탐사 여행은 계속됐다. 책을 통해 우리나라에 사는 고래에 대해 알게 된 아이는 이제 우리나라로 눈을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고래를 만날 수 있는 곳, 울산이다. 과거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고래잡이 사업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대표적인 도시 울산 장생포로 여행을 떠났다. 울산 장생포에는 고래잡이가 한창이던 장생포의 옛 모습을 구현해 놓은 고래문화마을이 조성돼 있다. 마을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모노레일과 고래박물관, 고래생태체험관도 함께 자리해 있어 고래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겐 더없이 좋은 여행지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장생포를 둘러보고, 장생포항에서 출발해 울산 연안을 탐사하는 ‘고래바다여행선’에 올랐다. 괌에서 탔던 페리보다 훨씬 큰 여객선이어서 고래가 다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날씨가 좋은 날엔 울산 앞바다에서 100여 마리의 참돌고래 떼를 쉽게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우리가 방문한 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고래바다여행선’에서는 돌고래 떼를 만날 수가 없었고, 고래생태체험관에서 지내고 있는 돌고래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울산을 다녀오고, 이듬해에는 우리나라에 돌고래 떼가 자주 출몰하는 제주도 서귀포시로 여행을 떠났다. 숙소 객실에서도 고래를 관측할 수 있다고 알려진 펜션을 예약했다. 푸른 제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전면 통유리창의 펜션에 묵으며 아이는 돌고래를 보겠다고 숙소 창가를 떠나지 않았다. 돌고래 투어와 우도 잠수함, 아쿠아리움을 체험하며 아이는 고래와 좀 더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가족은 고래를 찾아서 괌, 나고야, 울산, 제주도뿐 아니라 흰고래 벨루가가 있는 롯데 아쿠아리움, 고래의 뼈 화석을 볼 수 있는 강화자연사박물관,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등도 자주 방문했다. 아이에게 고래 관련 책들을 많이 읽어주었는데, 그중에는 안도현 작가의 <남방큰돌고래>라는 동화책이 있다.
“바다는 서로를 알아보았고 서로 뭉쳤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바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고 남의 하소연을 들어주기도 했다.
바다는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다는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다고 믿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 안도현 <남방큰돌고래>
동화 속 주인공 돌고래 체제가 살고 있는 바다에 대한 표현이 마치 나에겐 우리 가족을 비유하는 듯 가슴에 와닿았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 연결되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서로를 품어주는 바다와 같은 가족이다. 우리는 아이가 사랑하는 고래를 찾아서 기꺼이 함께 떠났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도 더불어 찾아보고, 새로이 배워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랑하면 닮아간다’라는 말이 우리에겐 취향과 관심사에도 일관되게 적용됐다. 아이와 공통된 주제를 두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면서 갖게 되는 공감과 유대감 그리고 함께하는 그 시간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가 없다. 최근에 다른 이와 공감을 나눠본 경험이 있는가. 어떤 대상이 됐든 하나의 주제로 즐겁게 나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는 시간을 통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