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그때, 우리 사이에 머물던 온기

by 현루


인연이라는 말에는 늘 시간이 함께 따라붙습니다. 그저 '인연'이 아니라, '그 시절의 인연'이라고 말하곤 하죠. 시간은 사람을 데려오고, 또 사람을 데려갑니다. 누군가는 한 계절처럼 스쳐 지나가고, 또 누군가는 몇 해를 머뭅니다. 어떤 인연은 찬란하게 피어나고, 어떤 인연은 조용히 스며듭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인연은 말없이 시들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라진 자리에는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편안하고,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 서로의 말에 웃고, 눈빛에 위로받고, 때로는 아무 말이 없어도 괜찮았던 사람. 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마치 계절 같았습니다. 햇살이 따스하고, 바람은 적당했고, 하루하루가 이유 없이 좋았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한 순간들을 사랑했습니다. 카페 구석자리에서 나누던 사소한 이야기, 함께 걷던 골목길, 눈이 내리던 날 창가에 앉아 마주 보던 눈빛. 모든 것이 평범했지만 특별했습니다. 그 순간들은 지금도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잊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떠올리면 울컥할 만큼 그리운 시간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연이 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별은 아주 천천히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문득 연락이 줄어들고, 서로의 하루를 궁금해하지 않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감정의 온도가 달라지고, 어느새 거리감이 생깁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애써 부정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서로의 상황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같은 계절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사람은 이미 다음 계절로 걸어가고 있었고, 저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 이별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아팠습니다. 울 수조차 없었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다 끝난 줄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제가 먼저 그 사람을 찾지 않게 되었고, 그 사람도 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아, 우리는 정말 이별했구나.

그 인연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한 시간들이 너무 따뜻했기에, 이별이 슬프기보다는 안타까웠습니다. '왜 우리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수없이 되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제 삶에 분명히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그 사람 덕분에 웃을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인연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인연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끝을 정해두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끝이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 서로의 계절을 함께 걸었기에, 그 시간이 소중했던 거라고.

지금도 가끔 그 사람을 떠올립니다.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을까, 혹시 저를 기억하긴 할까. 그리움은 가끔 꿈에까지 스며듭니다. 꿈속의 우리는 여전히 다정합니다. 손을 맞잡고 웃고, 아무 일 없던 시절로 돌아가 있습니다. 아침이 오면 깨져버리는 꿈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행복합니다.

그 인연은 끝났지만, 그 사람은 제 기억 속에 살아 있습니다. 잊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리워해도 괜찮습니다.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남아 있는 그 시절의 온기,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인연이 제게 준 것은 슬픔이 아니라 감사였다고. 그 시절,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이었다는 사실 하나로 저는 충분히 위로받았다고.

당신이 지금 누군가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면, 너무 아파하지 않길 바랍니다. 애써 붙잡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인연은 흐르되, 흔적은 남습니다. 그 사람은 당신의 인생에 가장 따뜻했던 계절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인연은 때로 물처럼 흐르고, 불처럼 타오르며,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흔적은 땅처럼 단단히 마음에 남습니다.

계절은 늘 지나갑니다. 그렇기에 더 찬란합니다. 그리고 다음 계절이 오기까지, 지나간 계절을 기억하는 일은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에게 봄이었습니다. 그 봄은 이제 끝났지만, 그 온기는 여전히 제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 인연을, 그 따뜻했던 시절을 조용히 가슴에 품습니다. 마치 햇살 좋은 날,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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