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장은 하나의 기억 저장소다. 책만큼 오래 남는 향수는 없다.”
– 오르한 파묵
창가에 놓인 작은 책상 위로 오후 햇살이 길게 드리운다. 그 빛 속에 엎드린 고양이가 느릿한 숨을 고른다. 책상 위엔 다 읽다 만 소설 한 권과 손글씨로 가득 찬 노트, 그 옆으로는 반쯤 비워진 커피 잔이 놓여 있다. 그 곁엔 책등이 가지런히 정리된 책장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겹겹이 쌓인 시간과 기억이 꽂혀 있는, 오롯이 나만의 풍경이다.
여긴 도서관도, 서점도, 멋진 인테리어가 있는 방도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 생생한 감각과 농밀한 기억이 깊이 쌓여 있는 공간이다. 책장 한 칸 한 칸마다 어느 계절, 어느 감정, 어떤 순간의 내가 눌러 담겨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처음 펼쳤던 무더운 여름밤, 『소년이 온다』를 덮고 한참을 울던 비 오는 날의 오후, 『달까지 가자』를 읽으며 속으로 몇 번이나 웃었던 출근길의 지하철. 그 순간의 공기와 향, 마음의 결까지도 고스란히 책 속에 스며들어 있다.
책은 읽을 때보다, 덮은 후에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시간이 지난 뒤 문득 표지를 쓰다듬을 때면,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감흥과 그날의 기억이 다시 피어난다.
@ 추천 책
『바깥은 여름』 – 김애란
"사람의 슬픔이 꼭 말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건 아니구나, 하고 처음 느꼈던 책이에요. 말하지 못한 마음이 공간 속에 남아 있는 느낌이 있거든요."
벽 한쪽에 기대어 앉은 나는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익숙한 문장들 사이에서, 문득 오래된 나를 마주한다. 이 서재는 단순히 책을 읽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서 울고, 웃고, 몰입하고,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어떤 날은 끝내 전하지 못할 편지를 써내려갔고, 또 어떤 날은 이유도 모른 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문장을 베껴 적었다.
그렇게 하나의 책장은 삶의 편린들이 놓인 서랍장이 되어간다.
책은 끝까지 묻지 않는다. “왜 그토록 아팠니?” “그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니?” 대신, 말없이 곁에 앉아 속삭인다. “괜찮아. 천천히 다시 읽어도 돼.”
그래서 나는 익숙한 책을 또 한 번 펼친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마음은 매번 다른 곳에서 멈춘다. 어느 날은 지나쳤던 문장이 갑자기 날 붙들고, 잊었다고 믿었던 장면이 문득, 오래된 향기처럼 되살아난다. 같은 책이지만, 결코 같은 나로는 읽을 수 없기에.
@ 추천 음악
Laufey – From the Start
재즈의 선율에 실린 일상의 감정들. 따뜻한 목소리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말 없이 옆에 앉아준다.
창밖엔 계절이 바뀌고, 세상은 빠르게 흐르지만 이 서재 안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어떤 책은 고등학생 시절의 나를 기억하고, 어떤 책은 서툰 연애를 지나던 20대의 혼란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 다른 페이지를 만들고 있다.
나만의 서재는 그런 곳이다. 기억이 쌓이고, 감정이 머물며, 다시 살아갈 단서를 찾아내는 풍경.
책장을 채우는 건 책이 아니라, 나의 시간들이다. 그래서 문득 힘들 때면, 나는 다시 이 자리에 앉는다. 고양이의 따뜻한 체온과 묵직한 책 한 권, 그리고 햇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한 뼘 더 너그러워진다.